성운이 쓴 '묘갈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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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지혜가 밝고 식견이 높아 진퇴의 기미를 잘 살폈으니 일찍이 스스로 보건대 세도(世道)가 상실되어 인심이 이미 그릇되고 풍속이 각박해져 성현의 가르침이 침체 되었으며 또 현인의 벼슬길이 기구하여 재앙의 기미가 은밀히 드러나니, 이 때를 당해서는 비록 교화를 만회시킴에 뜻을 둔다 해도 도(道)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결국 내가 배운 바를 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 뒤 사지(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또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 들여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할 때에 주상(主上)이 치도(治道)를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은 책 속에 실려 있으니 신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컨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과 의리(情義)가 서로 부합하여 환연히 틈이 없어야 더불어 다스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옛날 제왕들은 신하 대접하기를 벗과 같이 하여 더불어 정치의 법도를 밝혔으니 신하의 말을 듣고 칭찬하며 감탄한 성대함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야흐로 이제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서로 흩어짐이 마치 어지러이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마땅히 서둘러 구하기를 불난 집에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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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 남명 조식 선생 묘 |
ⓒ 김종신 |
이런 까닭으로 과시에도 나가지 않고 벼슬도 구하지 않았으며 뜻을 거두어 산야에 은둔하였으니 남명(南冥)이라 스스로 호를 짓고 그 정자를 산해(山海)라 일컬었으며 사(舍)를 뇌룡(雷龍)이라 하였다.
최후에는 두류산 수굴운동(水窟雲洞)으로 들어가 8∼9개의 서까래를 얽어매고 산천재라 편액하였으니 몸을 깊이 감추어 스스로 닦은 지 수 년이 되었다.
중종조에 천거되어 헌릉참봉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에 또 유일(遺逸: 산림의 어진 선비)로서 재차 전생서(典牲署)·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제수하고 이어 단성현감으로 옮겼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하여 글을 올려 이르기를 "국사가 날로 그릇되고 민심이 이미 떠났으니 그 반전의 기틀은 구구한 정치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사지(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또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 들여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할 때에 주상(主上)이 치도(治道)를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은 책 속에 실려 있으니 신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컨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과 의리(情義)가 서로 부합하여 환연히 틈이 없어야 더불어 다스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옛날 제왕들은 신하 대접하기를 벗과 같이 하여 더불어 정치의 법도를 밝혔으니 신하의 말을 듣고 칭찬하며 감탄한 성대함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야흐로 이제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서로 흩어짐이 마치 어지러이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마땅히 서둘러 구하기를 불난 집에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학문은 다스림을 내는 근원이고 학문은 마음으로 체득함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체득하면 천하의 이치를 궁구할 수 있고 사물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 만 가지 기미를 모두 잡아 스스로 무사할 것이니 그 노력은 단지 경(敬)에 있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으며, 또 삼고초려의 일을 묻자 대답하기를 "반드시 인물을 얻어야 한나라 왕실의 회복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번이나 찾아간 것입니다.""하니 주상이 칭찬하였다.
융경원년에 선조(宣祖)가 자리를 이어 받아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였고, 이어 부르는 왕명이 있었지만 또 사양하면서 소를 올려 "청컨대 구급(救急)이란 두 글자를 받쳐 몸 바침에 대신합니다."하고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진언했다. 선조 2년에 부름을 입었으나 사양하고 또 봉사(封事)를 올려 말하기를 "도(道)는 임금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데 있으니 명선성신은 반드시 경(敬)으로써 주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하고 인하여 서리(胥吏)의 폐단을 극언하였다.
한참 후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또 사양하였으며, 신미(辛未, 1571)에 큰 흉년이 들어 임금이 곡식을 내리자 글로써 감사를 드리고, 인하여 말하기를 "여러 번 상소를 올려 말씀을 드렸으나 말이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하였으니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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