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떠난 고아성, 꼭 그 질문을 해야 했을까

김성호 2024. 9. 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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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827] <한국이 싫어서>

[김성호 기자]

거 어디 출신이오? 영어로 하면 "웨얼 아 유 프롬 Where are you from?", 그러니까 나는 누구와 처음 만나 사귈 때는 출신지를 묻는 게 국제표준인 줄 알았지 뭔가. 자매품으로는 "하우 아 유 How are you?", 또 그에 대한 응답으로는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I'm fine, thank you. And you?"하고 근황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겼다.

막상 외국에 나가 사람들과 교류할 일이 많아지며 이것이 지극히 한국적인 물음이란 걸 알게 됐다. 특히 문화권 내에서 다양한 인종이 자리 잡은 유럽 국가에선 다짜고짜 출신을 묻는 게 어색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느 국가에선 이를 차별적 질문이라고, 민감하게 여기는 이들까지 있었다. 미국이며 호주처럼 정착 이민자가 많은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라 했다.

반면 다국적 뜨내기 노동자들이 모여 일하는 각국 항만에선 출신을 묻는 질문이 필수적이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나는 한국, 나는 슬로베니아, 나는 필리핀, 나는 파키스탄, 나는 영국, 나는 포르투갈, 나는 러시아, 나는 이집트, 나는 에티오피아 하는 답변들이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그로부터 발 빠르게, 필요한 만큼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들. 뭐 그렇고 그런 질문으로부터 간편한 친근감과 적의 없음과 간단한 이해와 신뢰를 확인하고 일을 처리했다.

어디선 필요한 질문이, 또 어디선 무례한 물음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항만을 벗어나 비교적 균일한, 또 사람들이 상당한 기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에선 이와 같은 질문을 어리석거나 민감하게 여기는 이가 있었다. 항만과 여행지의 뜨내기들 사이에선 자연스러운 것이 전혀 다른 취급을 받는 민감함이라니. 그 미묘한 차이를 한국 영어 교과서는 어째서 알려주지 않았나.

너무나 한국인인 그녀가 한국을 떠났다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 디스테이션
개인 간의 차이만큼, 실은 그보다 자주 각자가 살아온 문화권의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호구조사에 적극적인 문화권이 있고, 또 어떤 관점에선 너무할 만큼 저와 남의 신상을 교환하지 않는 문화권도 있었다. 그중 한국인의 감수성이란 어떠한 것일까. 불편에 민감하고 섬세하게 관계 맺기보다는 거침없이 정보를 나누고 효율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편에 가깝지는 않았나.

말하자면 <한국이 싫어서>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왔던 장면 또한 그러한 것이었다. 주인공 계나(고아성 분), 그러니까 '한국이 싫어서' 멀리 뉴질랜드까지 이민을 왔다는 그녀가 일터에서 당한 인종차별로부터 저를 구해준 앨리(트레 테 위키 분)에게 "웨얼 아 유 프롬"이라 묻던 그 장면 말이다.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앨리의 권고에 '그게 마오리족의 방식이냐'고 묻는 장면은 또 어떤가. 앨리와 대화하며 점차 드러나는 계나의 미묘한 표정은, 그녀가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 있더라도 뼛속까지 한국인이란 걸 일깨우지 않는가.

그렇다. <한국이 싫어서>는 주인공이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너무나도 한국인인 계나가 한국을 싫어한다고 여기게 되는 상황의 아이러니함을 그린다. 더없이 한국적인 구성원마저 한국을 싫어한다며 탈출하는 이야기, 사회와 국가의 실패를 넌지시 지목하는 이 장면이 내겐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10년 전 나온 장강명의 동명 소설은 당대 한국사회 젊은이가 느끼는 열패감과 절망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단 평가와 함께 큰 화제가 됐다. 시대와 사회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나 통찰이 담긴 소설은 못될지라도, 특정 세대에 상당한 공감을 일으킨 화제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영화화된 것이 장건재 연출, 고아성 주연의 영화 <한국이 싫어서>다.

영화는 소설의 큰 줄기를 따른다. 호주를 뉴질랜드로, 또 현지에서 만나는 상황을 일부 바꾸었을 뿐이다. 계나는 탄탄한 회사의 정규직 사원이다. 좋은 일자리가 말라붙었단 시대에 번듯한 일자리를 잡았으니 밖에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계나의 생각은 한참이나 다르다. 이 세상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엉망이다. 직장 상사는 공개입찰에도 불구하고 특정 업체와 계약하라고 계나를 몰아붙인다. "그런 걸 막기 위해 공개입찰을 하는 거잖아요." 계나의 반박에도 요지부동, 사람과 사람 사이엔 신뢰가 중요하다며 되지도 않는 소리로 특정 업체와 계약을 강요한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은 쳐봐야지"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 디스테이션
계나는 한국이 싫다. 그리하여 떠나기를 선택한다. 소설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초반부 문장을 영화는 계나의 목소리로 그대로 읊어간다. 그것이 그대로 떠남의 이유가 된다. 말하자면 '탈사표(脫師表)', 탈출의 사유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중략)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맨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11p (소설 한국이 싫어서 중에서)

번듯한 직장에다 다정하고 자상한 애인까지 있는 계나지만 그녀의 눈에 자신은 톰슨가젤일 뿐이다. 쫓아오는 사자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겨우 하루씩 생을 연명하는. 그러나 어느 날은 마침내 죽으리라고, 사자의 이빨이 숨줄에 박힌 채로. 그러니 도망이라도 쳐보겠단 것이 계나의 결심이다.

영화는 계나의 사정을 찬찬히 살펴나간다. 계나의 부모는 평생 일만 하며 성실히 살았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비좁은 빌라에서 살며 재건축에 모든 희망을 두고 버텨나간다. 조합부담금을 어떻게든 마련하려 애를 쓰지만 제 벌이로는 만만찮다. 대출은 끌어다 쓸 수 있을 만큼 끌어온 상태. 결국 딸 계나에게까지 손을 벌리는 것이다. 물론 계나는 효녀가 아니다. 얼핏 보면 왕 싸가지. 조금 더 가까이 가보면 철저한 개인주의. 그보다 깊이 들어가면 책임질 수 없어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이다.

부모에겐 선을 긋고, 애인에겐 미운 말만 하는 그녀다. 피해의식 가득한 태도로 애인의 무딘 선의에 맹폭을 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리 못된 애가 있는가 화가 치밀 정도다. 수틀리면 발끈 성부터 내는 계나의 못난 모습에도 타고난 천성이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이 쓰리게 다가온다. 영화가 이어질수록 드러나는 모양들, 이를테면 기약 없이 고시에 매달리다 목숨을 끊는 친구와 주변인으로 남겨진 채 나이만 먹는 젊음들, 희망을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상이 한국의 오늘이 어떠한 지경에 있는지를 말한다.

소설과 영화, 이들이 애써 보려 하지 않는 것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 디스테이션
여러 제약 때문일까. 원작도 충분치는 않았으나 영화는 그보다도 뉴질랜드에서 계나가 얻은 성취에 대해 얼마 조명하지 않는다. 시민권 취득과 양질의 일자리 획득에 이르지 못한 채로 그 과도기 어딘가에 멈춰 서는 것이다. 영화는 한국이 다른 세상보다 얼마나 더 '헬조선'인지도 효과적으로 부각하지 못한다. 계나가 가족과 애인을 떠나 얻은 것이 행복인지 불안의 해소인지를, 만족의 질과 양 또한 관객 앞에 효과적으로 보이지 못한다.

또 소설이 보려 하지 않았던 바, 한국과 호주의 단순한 대비 너머 존재하는 진실에도 여전히 관심이 없다. 널리 퍼진 불안과 과도할 만큼 치열한 경쟁,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사회의 문제 또한 얼마 부각되지 않는다. 한국이 이룩한 성장의 과실들, 세계적 수준의 복지와 사회안전망, 외연적 성장을 통해 주어진 혜택 같은 것도 모두 무시된다.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감히 꿈꿀 수도 없었을 뉴질랜드로의 이민, 또 나이 든 부모에게서 멀리 떨어지고도 큰 걱정을 않을 수 있는 환경, 제가 받은 양질의 교육 같은 것은 영화가 비추는 계나의 고충에 비해 너무나도 당연한 것쯤으로 치부된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자원을 가진 부국을 현재적 위협이며 치열한 경쟁 가운데 놓인 한국의 오늘과 단순 비교하는 근시안적 태도는 여전히 아쉬운 대목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선 저기 예멘이며 시리아의 난민들, 또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아프리카와 남미의 상대적 빈곤국 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장 전후 한국을 복구하고 산업을 일으킨 선배 세대조차 설득해 낼 수 없을 개인적 도주가 한국 사회에 어디까지 유효한 담론을 끌어낼 것인지 궁금하다.

영화 속 단 한 차례 등장하는 '바꿔내야지' 하는 외침의 허망함을 떠올린다. 어쩌면 이야말로 소설과 영화가 더욱 치열하게 천착하고 모색해야 했던 바가 아닌지 생각한다. 빈국의 고난이 그곳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이들이 잘못한 결과가 아니듯이, 부국의 혜택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주어진 혜택은 당연히 여기면서 저의 상실이며 좌절에만 주목하는 이에게 희망은 없다. 어쩌면 <한국이 싫어서>의 가장 큰 오류는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대신 손쉬운 회피며 외면, 포기하는 자세를 자연스레 여기는 태도가 아닐는지.

10년 늦게 도착한 영화와 오늘의 한국
 한국이 싫어서 포스터
ⓒ 디스테이션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하던 시절, 그러니까 2010년대 후반을 나는 바다 위를 오가며 보냈다. 저 멀리 타국의 항구에서 마주한 수많은 청춘, 지독한 가난과 불평등, 불공정 가운데서도 해낼 수 있는 최선을 해내려 발버둥 치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한국이 지옥이라면 세상 어디에나 그와 같은 지옥이 있다. 지옥이 아닌 곳이 오히려 적은 이 부조리한 세상 가운데서 희망을 이야기하며 변화를 꿈꾸는 이와 자조하고 도주만을 생각하는 이가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싸우고 바꾸어야 한다는 외침이 흩어지는 상황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다. 연대하여 싸우는 수많은 활동가가 커다란 돈을 배상하고 감옥에 간다. 그들이 맞서려 한 부조리는 어떠한가. 불법적 수단으로 부가 승계되고 경영권이 유지되어도 비판 여론이 얼마 일어나지 않는다. 부동산공기업 직원들이 부동산투기에 나서고, 공직자 자녀들이 부당 채용돼 어마어마한 퇴직금을 받아 챙긴다. 정부는 약한 구성원을 보살피지 않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은 연대해 뭉치지를 못한다. 한국이 진짜 싫어지는 건 이 모든 부조리를 앞에 두고서 그저 외면하고 도망치려는 이들을 마주할 때다.

10년이나 늦게 도착한 이 영화로부터 원작이 꺼내던 헬조선 이야기나 답습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은 헬조선이 아니다. 세상 곳곳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랑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내 나라다. 그 땅을 자격 없는 이들에게 내어주는 것, 포기하고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지옥도를 앞당기는 지름길이다. 스물 몇 살 계나가 찬 바람 몰아치는 조국의 북방에서 벌벌 떨며 근무하는 청춘을, 나랏법 없는 곳에서 치열하게 분투하는 직업인들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면 감히 쉽게 헬조선이란 말을 꺼내 들 수는 없었을 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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