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치밀한 계획에 당했다'... 파리가 확 달라졌다 [목수정의 바스티유 광장]
한류 열풍 속에서 한식의 맛과 멋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2024년 하반기 특집으로 세계 각국의 한식 열풍을 소개하는 '글로벌 공동리포트'를 기획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간 김밥, 유럽을 강타한 불닭볶음면과 바나나맛 우유까지... 세계를 사로잡은 한식의 다양한 모습을 공유합니다. <편집자말>
[목수정 기자]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문화적 쓰나미' - <르 파리지앵>
'깨어난 음식의 보고' '음식업계의 진정한 해일' - <마리 끌레르>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또 다른 소프트파워' - <르몽드>
급격하게 프랑스 사회에 번지기 시작한 한국 음식의 폭발적 유행을 묘사한 프랑스 언론의 표현들이다.
▲ 프랑스에서 발간된 한국요리책 |
ⓒ 목수정 |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젠 한국인들뿐 아니라, 중국계 한인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한국 식당도 우후죽순 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프랑스인이 연 한국 식당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비자로만 머물던 프랑스인들이 직접, 한국 음식을 판매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한국 음식 현지화의 정도를 가늠케 해주는 중요한 진화의 이정표다.
한국에선 케이푸드의 세계 정복을 케이팝, 케이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은 자연스런 수순으로 바라보는 것이 정설이나, 현지 언론들에게서는 한국 정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누벨옵스>(2019.2.17)는 "이것은 철저히 계획된 승리"라면서 "2007년부터 한국 정부는 프랑스의 많은 블로거들을 동원해 한식 문화를 홍보하기 시작"했으며, 2019년부터는 파리에서 케이푸드 페스티벌을 개최하기도 했다"고 보도한다.
그 결과 오랫동안 비빔밥과 불고기, 잡채에 소심하게 머물던 프랑스인들의 한국 음식 탐험은 이제 김치, 닭갈비, 해물전에 이어, 떡볶이, 팥빙수, 붕어빵 등 분식, 간식에 이르기까지 대범하게 그 장르를 넓혀가고 있고, 더불어 한국 디저트 전문 카페까지 줄지어 생겨나고 있다.
'단짠'에 접속한 프랑스 청년들
과거에는 압도적으로 많이 팔리는 메뉴가 비빔밥이었지만, 요즘은 닭강정에 대한 젊은층의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매출을 견인하는 식품 순위가 뒤바뀌었다는 것이 오랜 경력의 한국 요리사 류수현씨의 귀띔이다. 닭강정으로 단짠에 접속한 이들은 양념 치킨, 떡볶이, 김밥 등으로 한국 음식 탐험을 이어간다.
10년째 한국 음식을 탐닉 중인 프랑스인 다비드(38)는 친구들과 한국 음식점에 가게 되면 꼭 시키는 음식이 닭강정, 양념 치킨이라고 전한다. 한국인들은 놀라지만, 의외로 프랑스의 10대는 물론, 20-30대 입맛에 한국의 떡볶이도 쉽게 다가간다며 두 번째로 또래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음식으로 떡볶이를 꼽았다. 단짠을 섭렵한 이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매콤달콤한 맛인 셈이다. 고추장과 떡만 있으면 쉽게 해먹을 수 있어, 친구들도 종종 해먹는다.
▲ 김치 클래스에 참여하여 김치를 담그고 있는 프랑스인들 |
ⓒ 목수정 |
그러나, 점점 야채보다 고기 위주로 식탁이 차려지는 점, 양념이 점점 더 짜고 맵고 달아지는 점은 건강을 신경 써야 하는 나이에 이른 사람들에겐 다소 유감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이제 웬만한 한국 음식을 해 먹을 줄 아는 그에게, 유기농 한국 음식 식재료를 찾기 어려운 점도 아쉬운 점이다. 파리엔 유기농 전문 매장이 일반 슈퍼마켓 만큼이나 흔하고, 일반 슈퍼마켓에서도 거의 모든 품목에서 유기농 제품을 살 수 있는데 반해, 한인 마트에선 유기농 식품을 찾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3년간 살아본 경험이 있는 60대 프랑스인 자크는 "음식은 한국 고유의 생활 문화 가운데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켜온 유일한 영역 "이라고 말한다.
"한국 음식은 주변국과 서구의 음식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만의 색깔을 확고부동하게 지키며 한국인의 식생활 중심에 있다. 다른 모든 문화 영역에서 자기 고유의 것을 '전통'이라 부르며 뒷방으로 밀어내고, 서구 문화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과 매우 다른 점이다."
그래서 그는 그 무엇보다 한국 음식에서 한국 문화의 정수를 발견한다고 덧붙인다. 다만 파리의 한국 식당에서 아쉬운 점은, 음식과 함께 문화를 파는 일본, 중국, 인도, 태국 등의 식당과 달리, 모던함과 깔끔함으로만 실내를 꾸미고, 오직 음식 속에만 한국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 파리 루브르 박물관 맞은 편에 새로 문을 연 한인마트, 에이스 마트의 전경 |
ⓒ 목수정 |
1990년대, 파리2구의 일본-한국 먹자골목인 생딴 거리(rue St-Anne)에서 처음 문을 연 후, 현재 파리와 리옹에 한인마트와 분식점 등 8개 매장 100여 명의 직원이 일하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한 에이스마트의 역사는 파리에서의 케이푸드 성장사를 보여준다. 그 주인 진혜경씨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에이스마트는 언제 처음 문을 열었나 ?
"1997년 무렵이다. IMF 외환 위기가 오고 다들 힘들었을 때, 한인마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편과 함께 가게를 열었다. 동업하던 마트의 사장 두 분이 결국 마트를 내놓게 되어, 아르바이트생이던 남편이 인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주변 한국 식당 사장님들, 유학생 친구들로부터 두루 도움을 얻었다."
- 그 땐 한국 유학생들이 가장 힘들 때가 아니던가 ?
"그랬다. 학업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유학 중이던 나도 아이가 생기면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우린 여기서 생존을 고민해야 했다. 남편은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 1990년대엔 거의 한국 손님들 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언제쯤 프랑스 손님들이 생기기 시작했나 ?
▲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프랑스인들 |
ⓒ 목수정 |
- 도약의 계기가 뭐였다고 보나 ?
"흔히들 케이팝, 케이드라마의 역할이 크다고 얘기한다. 아이돌 스타들의 팬들, 드라마 주인공들이 먹는 음식을 따라 먹고자 하는 10대, 20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한국 음식 시장을 움직였다고. 이를 부인하진 않지만, 그것이 동력의 전부는 아니었다고 본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많은 젊은 유학도들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파리의 한인 식품업계 1세대들 보다 좀 더 열려 있고, 대부분 현지에서 교육도 많이 받았기에, 현지인들과 유연하게 소통하며 적극적으로 현지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세대들이 도약의 발판을 다진 것이 오늘의 성장을 이끄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고 본다."
- 외환위기에 처했던 것이 결국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 셈이다."
- 팬데믹의 긴 터널이 끝날 무렵이던 2022년말, 에이스마트 루브르점이 문을 열었다. 놀라웠다. 다들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그 때, 에이스마트는 더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우리는 당시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지 않은 드문 업체였다. 코로나 기간 중 대부분의 식음료 업체들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억대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우리는 사실상 타격이 없었다. 물론, 사람들의 발걸음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걸 계기로 돌파구를 궁리하던 끝에 에이트마트 인터넷 쇼핑몰을 열게 되었고, 그게 전국 배송까지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그 때, 시간적 여유가 좀 생기면서, 음식 뿐 아니라 오브제, 식기, 다기들도 같이 파는 매장을 열어보자 구상했다. 건축 공부했던 남편이 모든 내부 도면을 직접 그려가며 공사했고, 에이스마트 루브르점이 탄생했다."
- 매번 위기에서 더 큰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 비결이 뭐였을까 ?
"사실 손님들과 소통하다 보면, 거기에 언제나 답이 있다. 지금도 매일 매장에 나와서 카운터에서 직접 손님들을 만나는데, 그 분들이 지나가면서 해주는 말, 질문하는 것들, 요구하는 것들을 잘 들어보면, 어떻게 가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다기에 대한 아이디어도, 손님들이 그런 것들을 찾으셨기 때문이다."
- 에이스마트 본점이 있는 오페라 지구는 일본인들이 터줏대감인데 일본 식료품 매장은 하나 밖에 없고, 기모노 매장, 일본 전통 소품 매장, 서점 등 문화 상품이 많다. 반면 한국은 오직 음식만 팔아왔는데, 에이스 매장에 소품, 그릇 코너가 생겨서 반가웠다. 지금까지 오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같은 길목에 케이 마트가 생겼을 땐, 사실 타격이 좀 있었다. 그들은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이었고, 우리는 아시다시피 부부 둘이 운영하는 작은 규모다. 사실 케이마트는 우리에게 물건을 납품해 주는 도매상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같은 길에 더 큰 규모로 매장을 낸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그들로부터 물건을 받을 수는 없어서, 한국과 직거래 통로를 뚫게 됐다. 벼랑에서 아래로 떠밀었는데, 우린 그 바람에 낚시하는 법을 익히게 된 셈이다.
▲ 김치 클래스에 참여하여, 김치를 담그고 있는 프랑스인들 |
ⓒ 목수정 |
"루브르 점의 고객 80-90%는 프랑스인들인데, 이들이 제일 많이 찾는 품목은 김치다. 에이스마트가 자체적으로 만든 김치. 그리고 고추장, 된장 같은 양념 , 장류다. 프랑스 고객인들은 구매력도 높은 편이다. 한국인들은 점점 장류를 덜 사가는데, 이제 프랑스인들이 장류 소비의 메인 고객이 되었다.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매우 다른 음식 문화에 대해 여전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기꺼이 도전해 보는 프랑스인들 특유의 태도가 프랑스에서 한국 음식이 성공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다. 결명자차를 드셔보라고, 단골 고객에게 권하면, 처음보는 차인데도 기꺼이 시도해보고, 그 맛을 이해하고, 즐긴다."
- 맞다. 프랑스 중장년층은 이국의 음식뿐 아니라, 다른 문화적 호기심도 왕성하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 문화를 재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국 음식 자체가 가진 매력이 크다. 사실 이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 한국 음식은 일본 음식보다 장도 풍부하고(된장, 고추장, 쌈장 등) 맛이 강해서 발휘할 수 있는 맛의 스펙트럼이 넓다. 중국음식보다 덜 기름지고. 장과 기본 양념만 있으면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어, 진입 장벽도 낮은 편이다."
- 나도 김치의 영양학적 장점들을 알게 되면서, 채식을 할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의 하나로 이것을 전파하기 위해 이웃들 대상으로 김치 교실을 열어서 한 적이 있다. 그 본질을 알게 되면, 전파하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바로 그렇다. 그래서, 한식의 미래는 앞으로도 꾸준히 밝으리라 예측한다."
▲ 파리 샹젤리제에 오픈한 고급 한식당 순 그릴 내부 |
ⓒ Soongri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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