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업가 살해' 필리핀 경찰, 종신형 받았지만 도주…유족 분통

2023년 거행된 고(故) 지익주씨 7주기 추모식 영정 사진. 연합뉴스

한인 사업가 지익주(당시 53세)씨를 2016년 납치 살해한 주범인 필리핀 전직 경찰 간부가 8년 만에 유죄가 인정돼 종신형이 선고됐지만, 체포를 피해 달아났다고 연합뉴스가 9일 보도했다.

필리핀 경찰은 지난 7월 중순 주범 라파엘 둠라오에 대한 형 집행을 위해 주거지 등을 수색했으나 현재까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둠라오가 지난 6월 종신형(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2주 사이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고인의 부인 최경진(57·여)씨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달아난 주범 검거와 사건 실체 규명을 위해 정부가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필리핀 마닐라 항소법원은 지난 6월 26일 전직 경찰청 마약단속국(PNP AIDG) 팀장인 둠라오에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을 깨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둠라오의 하급자로 범행에 가담한 마약단속국 전 경찰관 산타 이사벨과 국가수사청(NBI) 정보원을 지낸 제리 옴랑에겐 1심과 같이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고(故) 지익주씨 피살 사건 상원 청문회에 나온 라파엘 둠라오. 사진 일간 인콰이어러

최씨 등 유족이나 교민 사회는 그의 도주가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둠라오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주도한 ‘마약과의 전쟁’ 당시 경찰청 마약단속국 팀장을 지냈고, 퇴임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최씨는 “전직 경찰 간부이자 변호사인 주범이 도주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예상했다. 도망가게 놔둘 거면 그동안 재판해온 게 무슨 소용인가”라며 “내 기다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비통해했다. 항소심에서 유죄가 인정된다면 둠라오가 가진 역량과 인맥 등을 고려했을 때 그가 도주할 공산이 컸다는 얘기다.

필리핀 사법 체계에선 유죄가 선고된 피고인은 형 집행 전까지 불구속 상태가 유지된다. 이 때문에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이 둠라오의 도주 우려에 대비해 선제적 조처를 해야 했다는 지적이 교민사회 안팎에서 나온다.

피해자인 지씨는 2016년 10월 18일 오후 2시쯤 앙헬레스 소재 자택에서 이사벨과 옴랑에게 납치된 뒤 경찰청 마약단속국 주차장으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이들은 다음 날 화장장에서 지씨 시신을 소각한 뒤 유해를 화장실에 유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7년 필리핀 검찰은 수사를 통해 둠라오 등 5명을 재판에 넘겼다. 이 사건은 현직 경찰이 직접 납치·살해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교민 사회와 필리핀 전역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로부터 1심 선고가 나오기까지 약 6년이 걸렸다. 지난해 6월 이사벨과 옴랑은 무기징역을, 둠라오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나머지 2명 가운데 1명은 수사에 협조해 ‘국가 증인’으로 풀려났고, 다른 1명은 코로나19에 걸려 숨졌다. 이 사건은 피고인 항소로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2017년 1월 로드리고 두테르테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자국 경찰관들에 의해 납치·살해된 한국인 사업가 지익주(당시 53세)씨의 부인 최경진씨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두테르테 당시 대통령은 최씨를 만나 유감과 위로를 전하며 충분한 배상을 약속했다. 연합뉴스

최씨는 둠라오가 사라진 뒤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다는 그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 이상덕 재외동포청장 등 관련 기관장과 면담을 요청할 계획이다. 필리핀의 협조, 재외동포 안전 등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남편의 사망 원인 등 실체적 진실 파악도 전혀 안 되고 있다고 밝힌 그는 “(2017년) 두테르테 당시 필리핀 대통령은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 국가배상을 약속했다”라며 “남편 사건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건·사고가 많은 필리핀에서 제대로 된 판례를 남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