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훈민정음의 탄생 미디어아트로 보고, 신윤복 그림 속 조선시대 걷고
은은한 달빛 아래 두 남녀가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수줍은 듯 애써 땅만 바라보는 여성과 그를 빤히 쳐다보는 남성. 아마도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 것 같은데요. 이 그림은 조선시대 후기 화가 신윤복의 ‘월하정인’입니다. ‘월하정인(月下情人)’은 말 그대로 달밤의 데이트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풍속화를 주로 그린 신윤복은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에 탁월했죠. 그중에서도 남편을 잃은 여성, 우물가에서 머리를 감고 빨래하는 아낙네 등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에 주목했습니다. 인물 묘사와 상황 설명이 뛰어난 신윤복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죠. 이런 신윤복 작품 속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인다면 어떨까요.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됐습니다.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 중인 간송미술관의 미디어전시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를 통해서죠.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한국 예술품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로 제목인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는 간송미술관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이 광복 후 남긴 문장에서 따왔다고 해요.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과 ‘미인도’, 겸재 정선의 ‘관동명승첩’,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전통예술작품 99점을 모션 그래픽, 라이다 센서, 키네틱아트 등의 기술을 활용해 역동적이면서 세련되게 재해석한 것이 특징입니다. 8개의 대형 전시실과 2개의 인터미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전시실마다 다른 향과 음악을 배치해 시각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꾸몄죠. 은은한 향기에 취해 전시에 몰입하다 보면 마치 조선시대 한양의 어느 골목에 와 있는 것 같답니다.
조선시대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세종대왕을 빼놓을 수 없죠.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글을 만들었는데요. 단순한 문자가 아닌, 우리 민족의 철학과 역사 그리고 정신을 담고 있는 언어 한글 창제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담은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세종대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보물 『훈민정음 해례본』은 미디어아트와 만나 하나의 세계로 재해석됐어요. 먼저 온 사방이 거울로 된 전시실에 들어서면 천장에 한글이 새겨진 큐브가 달려 있는데요. 이 큐브가 오색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동시에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비밀과 현재 한글의 영향력을 예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방으로 나아가면 어두컴컴한 가운데 반짝이는 빛을 머금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이 있어요. 이를 중심으로 강렬한 빛의 충돌이 시작되면서 세종대왕의 철학과 한글 창제 원리 등이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죠.
우주의 탄생과도 같은 강렬한 훈민정음의 탄생을 보고 난 뒤에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연 속 미디어아트가 관객을 맞이해요. 겸재 정선의 ‘관동명승첩’과 ‘해악전신첩’ 속 금강산의 모습이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붉은 꽃망울이 피어나는 봄을 지나 싱그러운 초록의 여름, 오색찬란한 단풍의 가을, 눈 내리는 절경을 뽐내는 겨울 등을 통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죠. 정선이 이토록 자연 풍경을 그리는 데 몰두한 이유는 후대에 조선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전시는 5분가량 진행되는데, 그림 속 주인공을 따라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바닥이 푹신한 짚으로 되어 있으니 편히 앉아서 감상하는 걸 추천합니다. 바닥과 마찬가지로 10대들에게는 생소한 짚향을 느낄 수 있어 더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드문 조선시대라 더욱 특별한 신윤복의 ‘미인도’를 만날 차례입니다. 최은지 간송미술관 학예사는 “신윤복이 왜 이 그림을 그렸고 어떤 여인인지 등 그림과 관련된 정보가 없다 보니 ‘미인도’를 주제로 상상을 펼친 소설·영화·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이 만들어졌고, 여전히 ‘미인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라고 설명했죠. 이어 “‘미인도’ 속 여인의 눈과 손 등이 살짝살짝 움직여요. 과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해보세요”라며 “여기에 여인의 신비로움을 담은 향이 더해져 그림에 더 몰입할 수 있죠”라고 재미있게 ‘미인도’를 관람할 수 있는 팁을 전했어요.
다음 전시실에서는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속 명장면이 사방 벽에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여 마치 조선시대 일상을 엿보는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달빛 아래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단옷날 그네 타는 여성들,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등 해학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조선의 삶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죠. 특히 양쪽 벽면 아래에 ‘자율주행 센서’와 더불어 직접 타볼 수 있는 ‘그네’가 설치됐는데요. 사람이 들어올 경우 센서가 인식해 바닥 그림이 함께 바뀌어 더 역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또 그네에 올라타면 단옷날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은 물론 이들을 엿보는 기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최 학예사는 “전시를 보다 보면 벽에 있는 틈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돌담 너머로 훔쳐보는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제작한 거예요”라고 말했죠.
‘혜원전신첩’관에서 나오면 새하얀 매화로 꾸민 포토 스폿이 마련돼 있습니다. 몰입형 미디어전시답게 화려한 기술이 더해진 포토 스폿에는 초속 5㎝로 꽃잎이 흩날려 이 순간을 포착해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매화로 꾸민 포토 스폿에는 은은한 수선화향이 맴도는데요. 매화와 수선화향을 선택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해요. 포토 스폿 맞은편에는 수선화와 매화를 사랑한 추사 김정희 전시관이 기획됐기 때문이죠.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연경(중국 베이징)에 간 김정희는 그곳에서 수선화를 처음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요. 그 후 수선화를 구해 정약용에게 선물로 보내는 등 수선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죠. 김정희 관에서는 수선화향과 더불어 묵향이 풍겨옵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면서 서예·역사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함을 뽐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죠. 이번 전시에는 그 가운데 ‘추사체’라고 불리는 김정희의 글씨체를 역동적이고 강렬하게 시각화했습니다. 추사체의 특징 중 하나가 견고함인데요. 그의 글씨를 축소하거나 늘려도 원본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죠. 최 학예사는 “추사체를 건축물에 빗대요. 특유의 조형미가 단단한 건축물 같기 때문이죠”라고 설명했어요. 추사체가 전시실 벽면을 온통 감쌀 때마다 묵향이 코끝을 자극해 마치 김정희가 글씨를 쓰고 있는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죠.
최 학예사는 “이번 전시의 메인이자 학생들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에요.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고 작품의 숨은 의도가 너무 좋아 학생들이 꼭 봤으면 해요”라며 ‘삼청첩’과 ‘금강내산’을 디지털화한 전시관으로 이끌었어요. ‘삼청첩’을 그린 이정은 세종대왕의 현손, 즉 왕족이죠. 이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을 맞아 오른팔을 잃었지만 그림에 대한 의지로 재활에 매진했고, 그 결과 ‘삼청첩’이라는 대작을 남겼습니다. 대나무·매화·난을 검은 비단에 수놓은 ‘삼청첩’은 금가루로 그리고 당시 최고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친 한석봉에게 글씨를 맡겨 작품의 완성도를 더했죠. 최 학예사는 “‘삼청첩’은 전쟁 직후 힘은 왜군에게 밀리지만 문화적 힘은 더 위대하며, 이 작품을 통해 고난을 이겨내자는 의미를 담았어요.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원나라의 침입을 불심으로 이겨내려고 했다면 ‘삼청첩’은 임진왜란의 상처를 극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래서 다른 전시보다 더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했죠”라고 얘기했어요.
‘삼청첩’에 이어 ‘금강내산’도 미디어아트로 변신했습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장대한 위엄을 그려낸 정선의 ‘금강내산’은 전통 장식품 자개와 강렬한 그래픽을 활용해 금강산의 화려함을 더 극대화했죠. 최 학예사는 “‘금강내산’ 그림 사이사이 실제 금강산을 컴퓨터 그래픽(CG)으로 구현해 진짜 금강산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중간중간 동물이나 곤충도 나오니 이들을 찾는 재미도 느껴보세요”라고 덧붙였죠.
마지막 공간에는 국보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을 추와 17.5㎝의 미니어처로 재해석한 작품이 설치됐습니다. 추의 움직임은 진자운동(일정한 축을 중심으로 일정한 주기 운동을 하는 물체)을 보는 듯한데, 이는 변치 않는 영원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요. 특히 이 전시관에는 기획 때부터 앉을 곳을 따로 조성했다고 하는데요. 최 학예사는 “자리에 앉아 작품을 바라보며 잠시 멍 때리기를 하다 보면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라고 귀띔했죠.
마지막으로 체험 코너도 마련됐어요. ‘타임슬립 투 조선’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찍으면 그림 속 인물로 바뀌어 묘한 재미를 선사한답니다. 인공지능을 사용해 내 모습을 그림 속 인물로 변환해주고 그 모습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구성했죠. 최 학예사는 “이달부터 전시 관람 후 SNS에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하면 기념엽서를 증정하는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으니 참여해 보세요”라고 권했죠. 이번 전시를 통해 전통예술작품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는 것과 동시에 전통 작품도 미디어전시로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간송미술관 미디어전시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
「 기간 2025년 4월 30일까지(월요일 휴관)
장소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 2관(2층)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입장 마감 오후 7시)
관람료 성인 2만원, 청소년 1만5000원, 어린이 1만원
」
글=이보라 기자 lee.bora3@joins.com, 사진=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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