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임금의 뇌물수수를 처벌하는 조문이 있는가?

2024. 9. 9.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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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아무리 엄벌해도 근절되지 않아
좀비처럼 끝까지 살아남은 범죄

장녹수에게 ‘호구’ 잡힌 이병정
태종 총애로 살아남은 신효창
사달은 모두 뇌물 때문에 벌어져

명품가방 받고도 수뢰 아니라니
조선 같은 중세 국가에서 사는가

인간이 거래를 시작하면서 뇌물 수수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기본 현상이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평등과 정의와 법치를 강조하는 민주공화국에서도 뇌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뇌물 수수는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다.

뇌물은 필요가 있기에 발생한다. 이해타산이 첨예하게 걸린 일에 뇌물이 섞이다 보니 뇌물의 세계에서 우연은 없다. 필요가 뇌물을 부르니, 전염성도 무척 강하다.

뇌물 수수를 아무리 엄벌해도 뇌물은 마치 코로나바이러스처럼 다양하게 변이하며 좀비처럼 나타난다. 인류 역사와 줄기차게 함께한 강력한 바이러스가 바로 뇌물이다. 역사상 뇌물을 근절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솔직히 불가능하다.

뇌물의 또 다른 속성으로는 뇌물 수수의 우회성을 들 수 있다.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주위에 지켜보는 눈도 많고 체면도 있어 뇌물을 직접 챙기는 빈도는 확연히 줄어든다. 그렇다고 뇌물을 멀리한다는 뜻은 아니다.

배우자나 친척처럼 가까운 사람을 통해 뇌물을 우회적으로 받는다. 너무 우회하다가는 배달 사고가 날 수 있기에 최고의 우회 루트는 배우자다. 그래서 뇌물은 대개 아내가 담당한다. 뇌물 공여자도 사모님을 통한 청탁이 더 효과적임을 경험적 데이터로 잘 안다.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는 수뢰의 달인이었다. 국왕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면서 비선 권력을 휘두르며 뇌물을 강취하는 데에도 탁월했다. 하루는 종2품 당상관 이병정이 종루 거리에서 서로 싸우는 여종들을 보았다. 가마를 멈추고 그들을 불러 엄히 훈계하였다. 그런데 한 여종이 핏대를 올리며 감히 대들었다. 격노한 이병정은 그 여종을 붙잡아 관아로 넘겼다.

그런데 며칠 후 엉뚱하게도 이병정이 의금부로 끌려갔다. 그가 혼낸 여자 노비의 주인이 바로 장녹수였고, 장녹수의 하소연을 들은 연산군이 격노했기 때문이다. 죄목은 간단했다. 연산군은 후궁 능멸을 국왕 능멸과 동일시하여, 이병정을 능상죄(凌上罪·윗사람을 능멸한 죄)로 걸었다. 당시는 갑자사화(1504) 시기라 능상죄로 걸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이에 이병정은 가산을 털다시피 해 뇌물을 준비해 장녹수에게 바쳐 살아남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장녹수는 앞으로도 자기 말 한마디로 너의 목숨을 뺏을 수 있다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이병정은 수시로 뇌물을 대령해야 했다.

시쳇말로 ‘호구’ 잡힌 것이다.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비선의 본체 장녹수의 노비를 몰라본 죄는 그처럼 무거웠다. 이병정은 당시 뇌물을 많이 받는 인물로도 유명했는데, 훨씬 고단자 장녹수에게 단단히 걸려들어 본인이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신효창은 태조의 측근이었으나 태종의 총애를 받아 숙청을 피하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관례를 무시한 고속 승진의 부당성과 예전에 태조의 측근인 점을 들어 신료들은 그의 숙청을 줄기차게 외쳤다. 이에 신효창은 태종이 총애하던 후궁 신녕궁주(信寧宮主)에게 뇌물을 바치며 호소했다.

그러나 이 일마저 드러나면서 그는 이제 뇌물죄까지 떠안았다. 사면초가였다. 신효창의 엄벌을 외치는 신료들의 목소리가 온 조정을 뒤덮자, 마침내 태종의 일갈이 조정에 울려 퍼졌다. “임금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처벌하는 법조문이 있는가.”(‘세종실록’ 즉위년 11월 15일 신유, 네 번째 기사) 이 한마디로 조정은 바로 얼어붙었다. 한마디 더 했다가는 바로 능상죄로 걸리기 때문이었다. 신효창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비싼 가방을 받았더라도 수뢰가 아니란다. 지위를 이용해 180만원 상당의 화장품과 300만원가량의 명품백을 받았는데, 그 수뢰자를 기소할지 말지 심의했다고 한다. 웃긴다. 피의자가 갑인가 보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청탁금지법 바로 알기’를 통해 “직무와 관련 없는 공직자에게는 100만원까지, 그 친족에게는 금액 제한 없이 선물 가능하다”라는 안내를 서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한 보수신문마저 그것을 “뇌물 가이드”라며 혹평했을까.

“임금의 뇌물 수수로 처벌하는 조문이 있는가?” 오히려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면 살아있는 민주공화국일 테요, 검찰이나 권익위처럼 굴종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중세 국가에 사는 꼴이겠다.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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