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최초의 질문] 이공계 후속세대에게 새겨지는 트라우마
최근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제자가 찾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국가 연구개발비의 갑작스러운 삭감 사태로 결국 박사후연구원 중 한 명과 재계약을 할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예정에 없이 갑작스럽게 계약을 끝낸 당사자도 당혹스러웠겠지만, 더 이상 고용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통보해야 하는 사람도 인생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금 우리나라 연구 현장 곳곳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새삼스럽지 않았지만, 학문 후속 세대의 싹을 자를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어땠을까 싶어 뭔가 도움이 될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더 어린 대학원생들은 진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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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 예산 축소, 연구현장 타격
‘의대 증원’에 이공계 인재 이탈
과학기술 대변혁 시대 맞이해
국운 건 인재육성 계획 수립을
」
이공계 인재풀에 울리는 비상벨
사실 더 큰 충격은 갑작스러운 의대 정원의 대폭 증원 여파가 가시화될 올해 연말에 다가올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의대 입시증원 규모는 거의 서울대 이공계열의 전체 선발 인원 혹은 KAIST를 포함한 4개 주요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의 총 선발 규모에 해당한다. 이미 서울대 이공계열 학과에서 휴학자가 늘기 시작했다는 통계가 지난 6월 언론에 보도된 바 있는데, 2학기에는 얼마나 더 증가할지 다들 걱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상위권 대학의 이공계 대학생들이 의대 입시를 위한 반수생으로 도전하고, 지방의대 학생들이 수도권 의대로 재도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공계 전체 인재풀에서 성적 상위권 인재가 예리한 칼로 도려지듯이 의대로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도미노 현상이 펼쳐질 것이다. 인공지능학과 등 올 3월부터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신생 첨단학과들도 갑작스런 의대 정원 확대의 폭풍을 피해 나가지 못했다. 최초 합격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추가 합격자로 정원을 채우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이들 합격 포기자들은 대부분 의대와 중복 합격하였거나 재수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고와 영재고의 우수한 인재들도 자퇴를 하거나 졸업하자마자 재수를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의대의 문이 갑작스럽게 넓어진 탓에 학부모나 입시생들의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2024년의 대한민국 이공계 인재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코호트’(cohort)라는 말은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대체로 유사한 세계관과 행동방식을 공유하면서 같이 나이 들어간다. 청년의 시기에 IMF 사태를 겪은 사람들을 IMF 세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한국의 이공계 인재풀에 거대한 하나의 코호트 집단이 형성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국가 연구개발비 삭감 사태로 연구현장의 젊은 연구자들은 언제든 연구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기억을 각인하고 있다. 내년에는 복원이 된다고 하지만, 올 한 해 동안은 삭감된 예산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이공계의 문에 들어서 마음잡고 있던 우수한 대학생들은 예상치 못하게 확 열린 의대라는 문에 다시 인생을 걸어보는 공통의 경험을 새기고 있다. 사설학원가에 줄지어 만들어지고 있는 의대반의 수많은 똑똑한 학생들 또한 의대 합격 하나만을 쳐다보고 청소년기를 보낸 기억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안정적이지 못한 연구환경과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의대 열풍이라는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나이가 들게 될 것이다.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이들이 한국의 과학계와 산업계, 나아가 우리 사회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래의 중추세력이 될 코호트에 어떤 기억을 새기고 있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인재 없이 국가 흥한 사례 없어
모두 인공지능 세상이 도래했다고 입을 모은다. 물리학·생물학 등 기초과학의 발견논리가 다시 쓰이고 있고, 자동차·전자·화학·미디어 등 기존 산업의 생태계 구조가 급변하고 있다는 데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다. 지금까지 보고 듣지 못했던 기술과 산업이 탄생하고, 그 결과 국가 간 순위에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새로운 운동장이 펼쳐지는 것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영토가 펼쳐진들 그곳에서 밭을 갈 사람이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현재의 인구구조 전망에 따르면 2025년부터 이공계에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의 절대 숫자 자체가 줄어들게 되어 있다. 게다가 국가연구개발비의 급격한 삭감조치 같은 불안정한 국가정책을 본 인재는 더 안정적인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근시안적 인재정책의 영향을 받은 더 어린 인재는 의사라는 직업 하나만을 바라보는 좁은 길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이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새롭게 펼쳐지는 신산업 지평에서 대한민국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쇠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인재가 떠나거나 한 곳에만 몰려있는 국가가 흥한 사례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명칭은 2차대전 중에 미국이 국운을 걸고 원자폭탄을 만들 때 만든 것이다. 그 이후로 여러 나라에서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을 추진할 때 프로젝트의 앞에 붙이는 경우가 있다. 최근 미국의 AI 전문가들이 제안한 ‘AI 맨해튼 프로젝트’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지금 한국의 국가적 인재육성 계획을 추진한다면,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공계 분야에 인생을 걸어도 의사 못지않게 불안하지 않고, 신나게 연구하면서,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고속철도 하나 더 건설하자는 각오로 임계점을 넘는 국가적 투자를 해야 한다. 그 덕분에 한국에 가면 내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해외 인재들도 자발적으로 걸어들어오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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