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대신 '두려움' 부상한 美대선…"선거 뒤에도 진영 대결 불가피"[특파원 리포트]
두 달을 채 남겨놓지 않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통합'의 메시지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통합이 사라진 자리는 정치가 초래할 '위기'와 '두려움'이 채우고 있다.
총격 테러 이후 공화당 전당대회 등에서 통합을 전면에 내세웠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등판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하자 특유의 '막말 공세'를 재개했다. 서로를 극단주의로 모는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해리스 부통령은 정치적 신념이라고 밝혔던 환경 및 기후대응과 직결되는 공약까지 번복하고 나섰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오는 11월 미 대선이 막을 내려도, 선거 기간 나타난 미국 정치의 양극화가 최소 10년 이상 지속될 거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해리스는 지난 6일(현지시간) 기준 이민, 환경, 의료보험 등 9개 분야에서 기존의 입장을 변경했거나 입장을 유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 사례가 2020년 대선 때 환경보호를 위해 금지하겠다고 했던 셰일가스 추출을 위한 수압파쇄법(fracking·프래킹)을 허용하겠다고 번복한 일이다. 세계적 셰일가스 산지인 펜실베이니아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펜실베이니아는 이번 대선의 최대 격전지로 꼽힌다.
해리스는 또 상원의원 시절 본인이 직접 발의했던 전기차 의무화에 대해서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고, 바이든 행정부 내내 비판을 가했던 남부 국경의 장벽 건설에 대해서도 사실상 지지로 선회했다. 이밖에 고령자 의료보험의 전국민 확대 추진, 모든 희망자에 대한 연방정부의 일자리 제공 정책 등도 철회했다. 해리스는 그러면서도 지난달 29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내 정책적 관점과 결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측면은 내 가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애매한 입장을 밝혔다.
극단적인 후보…‘두려움’이 된 대선
그러자 해리스를 ‘급진 좌파’로 몰아세워 왔던 트럼프는 “해리스가 거짓말을 한다”며 지지층을 더 강하게 결집시키고 있다. 앞서 트럼프는 7월 말 해리스가 민주당 대선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확보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을 때에도 "거짓말쟁이 해리스" 등 원색적인 표현으로 비난했다.
해리스가 정치적 소신을 번복했다는 비판을 감수하고도 이런 행보를 보이는 배경엔 두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4일 공개된 CNN의 애리조나, 조지아, 미시간, 네바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등 6개 경합주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54%는 “트럼프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답했다. 해리스를 지나친 극단주의자라고 평가한 비율은 44%였다. 유권자의 48%는 트럼프가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 반면 같은 질문에 대한 해리스의 비율은 39%였다.
유권자의 과반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고 평가하는 트럼프에 비해 해리스가 상대적으로 지지층을 확장할 여력이 있다는 의미다. 최종 승자를 예상하기 어려운 초박빙 판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정치적 소신까지 뒤집는다는 해석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두 양극단의 후보들이 출마한 이번 선거를 ‘두려움’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뉴욕타임스(NYT)가 민주ㆍ공화당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쓰는 단어를 분석한 결과 양쪽 모두 불안(nervous), 초조(anxious), 두려움(scared), 걱정(sorried) 등을 우선 순위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민주당 지지자들의 경우 두려움이 된 선거의 의미에 대해 ‘관심(concerned)’이라는 표현을 쓴 반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중요(important)’라는 보다 강한 표현을 쓰고 있었다. 퓨리서치 센터의 정치연구 책임자 캐럴 도허티는 NYT에 “이번 대선을 위험 요인으로 인식하는 대중이 많아졌다”며 “양쪽 모두 작은 실수나 정책적 차질이 빚어질 경우 유권자들은 이를 더 확대 해석하며 예상 외로 큰 규모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등불’ 미국의 위기”
이런 구도는 이번 대선의 승패를 결정할 경합주에 대한 양측의 선거 전략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일종의 ‘갈라치기’가 적용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해리스가 펜실베이니아에서 정치적 소신을 뒤집는 '우클릭' 정책으로 수성전을 펼치자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에서 활동하는 극우 유튜버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의 전방위 공성전을 펼치고 있다.
토마스 슈워츠 밴더빌트대 교수는 본지에 “이번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270 대 268, 또는 275 대 263의 매우 초박빙의 승부가 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예상했다. 로버트 슈멀 노터데임대 교수도 “지난 대선에서 이미 대선 불복과 의회 폭력을 경험했지만, 이번엔 4년 전보다 더 강한 진영간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며 “이번 선거는 미국이 계속 ‘자유와 민주주의의 등불’로 남을 수 있을지를 결정할 매우 위험하고도 중요한 선거”라고 평가했다.
“양극화 최소 10년”…한국엔 ‘외교 과제’ 가능성
중앙일보가 인터뷰한 관련 전문가들은 선거 과정에서 심화된 미국 정치의 양극화가 선거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시다 스코치폴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 2번의 선거에서 전국 기준 46%대 득표로 당선과 낙선을 기록했던 트럼프는 이번에도 47%가 상한선이 될 것”이라며 극단적 진영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갈등의 골이 환경, 노동, 인권 등 전 분야로 확대되면서 양극화는 10년 이상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미국 전문가인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양극화로 인한 미국 국내적 정치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미국 대통령의 권한이 외교로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선거 과정에서 해외 분쟁 불개입과 자국 우선주의, 극단적 보호무역와 미국 내 생산 압박 이슈가 커지면서 한국은 보다 큰 외교적 과제를 안게 될 가능성에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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