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법불아귀와 디케

2024. 9. 8. 18:03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사정기관 고위공직자들이 취임하면서 즐겨 쓰는 표현이 있다.

중국에 '법불아귀 승불요곡'이 있다면, 서양에는 정의의 여신 디케가 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정기관 고위공직자들이 취임하면서 즐겨 쓰는 표현이 있다. 법불아귀 승불요곡(法不阿貴 繩不撓曲). 이 구절은 중국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 유도편에 나온다. ‘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것을 따라 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귀천에 따라 법이 달리 적용돼서는 안 된다.

퇴임을 앞둔 이원석 검찰총장과 지난 5월에 취임한 오동운 공수처장도 취임하면서 이 표현을 인용했다. 권력과 돈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초심을 주권자인 국민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초심불망(初心不忘)의 의지가 초지일관(初志一貫)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은 잘 알고 있다.

중국에 ‘법불아귀 승불요곡’이 있다면, 서양에는 정의의 여신 디케가 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공정하게 법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은 ‘저울 없는 칼은 물리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고 칼 없는 저울은 무력한 것이 될 뿐이므로 저울과 칼이 함께 갖추어질 때에만 법은 지켜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옛날 ‘법불아귀 승불요곡’이나 ‘정의의 여신 디케’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헌법 제11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셋 중 두 명이 ‘한국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기득권의 부정부패’를 불공정의 첫 번째 원인으로 꼽았다. 즉, ‘우리 사회가 법 앞에 평등하지 않으며, 그 원인은 기득권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인식하는 국민이 많다는 의미다.

입으로는 너도나도 ‘법 앞에 평등’을 떠들었지만, 실상 돈을 가진 사람은 돈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이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을 농락하고 디케의 저울을 기울게 했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리라. 법 위에 군림하는 돈이나 권력을 가진, 혹은 둘 다 가진 일부 기득권을 목도하는 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오죽하면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게 아니라 ‘법 앞에 만명만 평등하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사실 ‘법’은 죄가 없다. ‘만명’을 제외한 나머지에만 법을 적용하는 사람이 문제일 뿐.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