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이 쓴 '묘갈명' (1)

김삼웅 2024. 9. 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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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33] 무덤 앞에 세운 둥그수럼한 돌비석을 말한다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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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의 생애를 압축하는 글이 묘갈명(墓碣銘)이다. 무덤 앞에 세운 둥그수럼한 돌비석을 말한다. 여기에 새긴 글이 묘갈명이다. 일종의 약전이라 하겠다.

남명의 묘갈명은 학인이고 우인(友人)인 성운(成運)의 작품이다. 남명의 생애와 사상·철학을 제대로 짚은 글이다. 내용이 길어서 3회에 나누어 싣는다.

조(曺)씨는 옛부터 드러난 성(姓)으로 대대로 인물이 났으니 그 선대에 고려 태조 때 벼 슬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휘 서(瑞)라는 분이 있었는데 덕궁공주(德宮公主)가 그 어머니이다. 그 뒤로 서로 이어 현창(顯昌)하여 휘 은(殷)은 중랑장(中郞將)이니 공(公) 에게는 고조이고, 이 분이 휘 안습(安習)을 낳았으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생원이 휘 영(永)을 낳았으니 벼슬하지 않았다.

그 아들 휘 언형(彦亨)은 처음에 재예(才藝)로 뽑히어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꼿꼿하고 남과 어울림이 적어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벼슬로 별세 했으며 부인 이씨는 충순위(忠順衛) 국(菊)의 따님으로 규방의 법도가 있어 남편을 섬김에 덕을 어김이 없었다.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니 식(植)이 이름이고 건중(楗仲)은 그 자(字 )이다.

공(公)은 태어남에 체격이 우람하고 용모가 빼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정중함이 어른과 같아 또래들을 따라 장난치지 않았고 놀이 도구도 또한 손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판교공이 사랑하여 말을 할 때부터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시와 글(詩書)을 가르쳤는데 응대하여 문득 글귀를 외워 잊지 않았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모부인이 근심스런 안색을 지으니 공이 자세를 가다듬고 기운을 내어 거짓 차도를 보이며 고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헛되이 하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부여한 바가 있어 저에게 이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데 제가 어찌 오늘 갑자기 요절함을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듣는 이가 비범하게 여겼다.

점점 자람에 온갖 서적을 널리 통달하였고 더욱 좌구명(左丘明) 류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좋아하였으니 이런 까닭으로 문장이 특이하고 고상하면서 기력(氣力)이 넘쳤다. 사물을 읊고 일을 기록함에 처음부터 뜻을 기울이지 않은 듯 하였으나 말이 엄하고 뜻이 세밀하여 엄연히 법도가 있었다.

과거로 인하여 유사(有司)에서 문예를 바치니 유사가 대책(對策: 과거 시험의 일종익 책(策)에 대한 답안)을 보고 크게 놀라 일등·이등으로 발탁한 것이 무릇 세 번이었으며 고문(古文)을 배우는 이들이 다투어 전하여 암송하면서 본보기로 삼았다. 가정(嘉靖) 5년(1526)에 판교공이 세상을 떠나니 공은 한양으로부터 상여를 받들어 고향의 선산에 안치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와서 받들어 봉양하였다.

공이 어느 날 글을 읽다가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말 중에 '이윤(伊尹)의 뜻을 뜻 삼고 안연(顔淵)의 학문을 배우라'는 글귀를 보고는 깊이 깨달아 발분하고 뜻을 가다듬더니 육경(六經)·사서(四書) 및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가 남긴 책을 강송하며 이미 하루 해를 다하고 또 밤중까지 계속하면서 힘을 다하고 정신을 쏟아 연구 탐색하였다.

공은 학문에는 경(敬)을 지니는 것보다 요긴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중하는 공부에 전념하여 밝게 깨어 혼매하지 않았으며 몸과 마음을 거두어 지켰다. 또 학문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극기에 힘써서 찌꺼기를 씻어 내고는 천리(天理)를 함양하였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였고 깊은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성찰하여 앎이 이미 정묘한 가운데 더욱 그 정묘함을 구하였고 행함에 이미 힘쓴 가운데 더욱 그 힘을 기울였으며 몸소 돌이켜 체험하고 실지를 밟는 것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그 경지에 도달함을 구하였다. 중종 24년에 모부인 상을 당하여 선친의 묘 왼편에 장사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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