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죽음 비밀로 하고 시동생 찾아간 여성... 대담함의 결말

김종성 2024. 9. 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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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우씨왕후>

[김종성 기자]

티빙 사극 <우씨왕후>의 주인공은 형이 죽은 뒤 동생과 결혼하는 형사취수혼을 서기 197년에 대담하게 성사시켰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삼국사기>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됐다. 웬만한 주요 사건은 가급적 한 문장으로 간단히 처리하는 이 역사서는 우씨왕후의 재혼에 대해서만큼은 꽤 길고 상세히 묘사했다.

그는 남편인 고국천태왕(고국천왕)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그날 밤중에 시동생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남편감을 물색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태왕(산상왕) 편은 그런 우씨왕후의 모습을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극적으로 서술했다.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성사했으니, 김부식을 비롯한 보수적인 유학자 집필진도 한두 문장으로 간단히 기술하고 끝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시동생 찾아간 우씨왕후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우씨왕후는 두 명의 시동생을 찾아가 왕위를 제안하고 연대를 제안하는 도박을 벌인 끝에 작은 시동생 고연우와의 동맹했다. 우씨는 이 혼인을 성사시켜 남편이 죽은 다음 날 차기 군주의 왕후가 되는 데 성공했다.

우씨의 첫째 시동생인 고발기는 그날 밤 우씨의 첫 번째 방문을 받았지만, 형의 죽음을 알지 못해 형수에게 퇴짜를 놓았다. 그러면서 "부인이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은 예법이 아니다"라며 무안까지 줘서 형수를 내보냈다.

고발기가 우씨로부터 받은 제안은 "태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태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감춘 채 그런 제안을 했으므로, 고발기는 당연히 퇴짜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고발기의 반응은 우씨의 접근 방식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우씨는 그 직후에 둘째 시동생 고연우를 만났을 때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구사했다. 이번에는 태왕의 죽음을 미리 알려주고 동맹을 제안했다. 이 방법은 주효했다.

다음 날 새벽, '고연우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고국천태왕의 유언이 발표되고, 훗날 산상태왕으로 기억될 고연우가 태왕 자리에 올랐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고발기에게 넘어갔을 왕위가 우씨와 연합한 고연우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했다. 새벽에 왕궁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자신이 왕위를 도둑맞았음을 알게 된 고발기는 초법률적 수단을 동원했다. 우씨·고연우 혼인무효소송이나 고연우 즉위무효 소송 같은 것에는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우씨의 대담한 도박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우씨의 대담한 도박은 고구려를 그 같은 내전 직전 상황으로 몰고 갔다.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지 않아 고발기가 3일 뒤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면 고구려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발기의 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씨와 고연우의 제휴를 비판했던 고발기는 후한(후기 한나라) 요동태수인 공손탁과의 야합을 서슴없이 감행했다. 이는 고구려의 국운에 악영향을 끼치는 단계로 발전했다.

외세의 힘을 빌려 태왕 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심한 고발기는 자신이 관할하던 요동 땅을 공손탁에게 넘긴 뒤 3만 군대를 빌려 고구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고발기는 전쟁에서 패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본 것은 공손탁이다. 고구려 왕실의 내분 덕분에 그는 손쉽게 요동 땅을 차지했다. 우씨의 대담한 결혼이 고발기의 고구려 배신으로 이어지더니 고구려 영토 상실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그런 난리를 겪으며 시동생과 결혼하고 왕후 지위를 유지한 우씨는 그 뒤에는 시동생의 여자 때문에 난리를 겪었다. 우씨의 몸에서 후계자를 얻지 못한 산상태왕은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렸다. <삼국사기>는 산상태왕이 우씨와 혼인한 지 11년 뒤인 208년에 주통촌(酒桶村)에 사는 스무 살 전후의 여성을 가까이했다고 알려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씨는 병사들을 보내 여성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여성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여성이 산상태왕의 아이를 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씨의 밀명을 받은 병사들은 태왕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여성을 감히 해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은 아이를 낳았고, 산상태왕은 교체(郊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우씨는 이 아이 때문에도 속앓이했다. 아이를 미워한 나머지, 끊임없이 괴롭힘을 가했다. 아이가 태자가 된 뒤에도 괴롭혔고, 227년에 태왕이 된 뒤에도 괴롭혔다.

우씨는 234년에 생을 마감했다. 눈을 감기 전, 그는 37년 전의 형사취수혼을 후회하는 말을 남겼다. "내가 절개를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국양왕(고국천왕)을 지하에서 본단 말이냐"라고 말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그러면서 우씨는 자신을 산상태왕 곁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 "내 시신을 계곡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않으려거든 나를 산상릉 곁에 묻어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동천태왕은 그 유언대로 해주었다. 그러면서 고국천태왕의 무덤에서 대규모 공사를 벌였다. 이 무덤을 일곱 겹의 소나무로 병풍처럼 에워싸는 식목 공사였다. 이 공사는 무속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무속인이 동천태왕에게 진언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부인이 동생과 함께 묻히는 것을 본 고국천태왕은 무속인에게 나타나 격한 분노를 표시했다. 무속인에게 나타난 고국천태왕은 자신이 전날 우씨와 싸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무속인에게 "낯이 부끄러워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라며 "물건으로 나를 가려 주게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무속인이 들려준 이 부탁에 따라 동천태왕이 고국천태왕의 무덤을 소나무로 가려주는 공사를 벌였다.
 <우씨왕후> 메인포스터
ⓒ T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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