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에 알려진 '여자의 천국'... 여성 손님들로 늘 만원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기자]
▲ 1922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빅토르 마르께리테의 소설 <라 갸르손느> |
ⓒ 플라마리온 |
1922년에 빅토르 마르께리테(Victor Margueritte)가 소설 <라 갸르손느>(La Garçonne)를 출간한 것이 계기였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보다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고, 종종 남성스러운 특성을 드러내는 과감한 여성 주인공 이야기였다.
갸르손느들은 짧은 단발머리, 가슴이 납작한 실루엣, 헐렁한 드레스, 바지, 슈트와 같은 중성적인 의류로 자신들의 저항을 드러냈다. 오래도록 지켜오고 강요되어 온 남성 중심의 젠더 규범에 대한 강한 도전이었다.
이런 파격적 도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929년에 시작된 경제 대공황, 파시즘, 제2차 세계대전은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는 보수적 물결을 가져왔다. 여성들은 다시 모성에 충실한 가사 담당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번창으로 글래머러스한 여성, 우아한 여성, 신비한 여성이 대세가 된 것도 갸르손느 문화의 퇴조를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
물론 1920년대에 피었던 갸르손느 문화가 완전히 말라버린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까지 여성의 심성과 사회 저변에 잠재해 있던 '갸르손느' 문화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세계적인 여성 해방운동과 양성평등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터에서의 남녀 간 불평등 해소는 대표적인 이슈였다. 여성의 고유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이 벌어졌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던 민권 운동이었다.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1920년대 '갸르손느'로 상징되는 제1의 물결을 이어받은 제2의 물결이었다.
1980년대 초반 등장한 '유니섹스' 물결
여성운동 제2의 물결이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표현은 '유니섹스' 물결이었다. 1980년대 초반의 대학가 다방은 이런 유니섹스 물결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요즘은 의미조차 없어진 단어 '유니섹스'는 남녀 간 성에 따른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여성은 남성화되고 남성은 여성화되는 분위기를 상징하였다. 출발은 머리 모양과 복장이었다.
▲ 1983년 8월 31일 자 <경향신문> 기사 "전후세대(5) 무너지는 금남·금녀의 울타리"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남자들의 서비스를 받는 여성 손님들로 이 다방들은 늘 만원이었다. 요즘은 흔한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다방에서 들리는 남녀 간 호칭도 관심거리였다. 여학생이 연장자인 남자 친구나 선배에게 "○○형" "자기"라고 부르는 소리가 낯설어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시절이다.
당시 유니섹스 문화를 보여주는 유행 중 하나는 낙서였다. 다방마다 벽에는 온통 낙서였다. 낙서 문화의 발상지인 신촌 대학가 다방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낙서에 참여하던지, 낙서를 구경하는 재미였다. "000-0000번으로 연락 바람. 키 175 이상 유머 감각 필수"란 여학생의 글 밑에는 요즘 댓글처럼 남학생들의 전화번호가 길게 달렸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니섹스 문화가 등장하여 번지고 있었지만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제도나 현실 속에서 사라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 직장에서 외부 손님을 위해 커피를 타는 일은 여직원의 몫이었다. 아침 출근과 함께 마시는 모닝커피를 타서 입사 동기인 남자 직원에게 가져다주는 일은 여자 직원의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국제연합의 요구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1983년 12월 27일 자 <동아일보>는 당시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던 '직장서 남녀차별 하지말라' 운동을 흥미롭게 보도하였다. 부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보도였다.
우수한 대졸 여성까지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예사였던 일본의 직장 문화에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일본은 경제발전에 비해 남녀 차별이 심한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노동성이 '기회균등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당연히 부러운 뉴스였다.
'로보트혁명-기선 잡은 일본'
당시 일본에서의 여성 차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는 몇 가지였다. 직장 생활 초기에는 비슷하던 남녀 신입 사원의 임금이 시간이 지나면서 남성 우위로 급격히 바뀌는 문화, 우수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라고 해도 비서실 등에 배치해서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문화, 결혼하면 여성의 경우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문화 등이었다.
일본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던 것이 우리나라 직장에서의 여성 차별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국제연합의 요구도, 자발적인 변화 움직임도 없었다.
당시 일본의 '근로기준법'은 국적과 종교에 따른 직장 내 차별 대우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성별에 따른 차별은 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많은 여성단체들의 노력으로 일본은 드디어 1986년에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채용과 승진 등 주요한 분야에서 차별을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부여하는 정도의 선언적 규정에 그쳤을 뿐이었다. 이런 소식조차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이 1980년대 우리나라의 여론이었다.
1980년대 초반 일본을 부러워한 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니었다. 미국도 일본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1983년 미국의 '교육수월성국가위원회'는 보고서 '위기에 선 국가: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는 일본과 독일 등 경쟁 국가들의 질주, 그리고 한국 등 신흥 발전 국가들의 도약을 소개하며, 미국이 지금의 교육으로 미래를 맞는다면, 21세기에 미국은 이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런 위기를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분야 중 하나가 로봇산업이었다.
1983년 2월 26일 자 <매일경제> 기사 '로보트혁명-기선 잡은 일본'은 미국의 위기를 전하였다. 로봇의 출현은 경이적인 반도체 기술이 진보한 결과라는 것, 로봇이 공장을 움직이는 과학소설의 환상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변화를 추도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라는 보도였다. 전혀 새로운 유형의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 이를 따라가려고 힘겨운 경쟁을 하는 미국의 모습을 대비하여 전하였다.
공장 노동력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는 로봇 소식을 전하면서 이 신문은 로봇의 이점을 몇 가지 나열하였는데 매우 흥미롭다. 첫째가 로봇에게는 커피 휴식을 줄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어서 병가가 없고, 휴가도 없다는 점, 시간 외 수당 없이도 하루 24시간, 그리고 주말에도 일을 하는 장점을 지닌 것이 로봇이었다. 그러면서도 노동의 질이 예측 가능하고 결함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였다.
남녀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유니섹스 문화, 그리고 커피브레이크를 줄 필요가 없는 로봇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이었다. 1983년 말 서울 시내에 6698개의 다방이 영업 중이었고, 정부는 올림픽을 대비해 국산차 보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시민들이 드디어 건강한 커피를 찾기 시작했고, 동서식품이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디카페인 커피 '상카'의 시판을 시작하였다.
(교육학 교수,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유한희(2013). 일본의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의 제정 및 개정과정과 그 효과에 관한 연구-관료중심적 결정과정과 여성의 임금과 취업형태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1983년 기사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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