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조효석 2024. 9. 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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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 기자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이 있다. 말문이라면 아마 말이 소리로 나오는 통로, 즉 입을 말한 것일 테지만 문자 그대로 입이 막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통은 생각도 못한 이야기나 사건을 보고 들은 탓에 어처구니없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쓴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치는 유튜브를 다루는 부서에 있다 보니 요즘엔 면역이 생겼는지 어지간해선 그런 일이 드물다.

오랜만에 흔치 않은 경험을 한 건 일주일 전 목요일이다. “의료현장을 가보시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습니다. 지역의 종합병원 이런 데 좀 가보시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일단 비상진료체계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고….” 적어도 뉴스를 매일 보고 읽거나 쓰는 직종의 사람이라면 이날 대통령의 회견에서 나온 이 말에 귀를 의심치 않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뜨악했던 건 지금껏 보고 들은 의료현장의 모습과 그의 인식 사이 간극이 상상 이상인 걸 깨달아서다. 응급실에 남아 매일 밤을 지새우는 의사의 절망, 약식 교육만 받고 전공의 자리에 투입되는 진료보조(PA) 간호사의 두려움, 체력의 한계에 부닥쳤다는 구급대원의 호소와 제때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의 고통. 대통령은 그 모든 얘길 현장에 가보지 않고 쓴 소설로 치부해버렸다.

사실 그보다 말문이 막힌 건 앞선 발언이었다. 의료현장의 위기를 들며 대응책을 묻는 질문을 두고 대통령은 “의대 증원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는 분들의 주장을 말하고 있다”고 받아쳤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껏 관련 문제를 보도하고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 모든 매체와 기자는 졸지에 ‘의대 증원을 완강히 거부하는’ 무리가 된다. 어떻게 그런 인식이 가능한지, 일주일이 지난 이 시점까지 곱씹어도 짐작이 어렵다.

회견에 앞서 국정브리핑이 열린 대통령 집무실에선 예의 몇 번이나 방송을 탄 유명한 명패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우방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명패에는 ‘The buck stops here’라는 영어 문장이 적혀 있다. 풀어 말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이다. 받은 지 2년이 지나도록 명패가 책상 위에 있는 걸 보면 아마 임기 마지막 날까지 그대로 머무를 듯하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이 즐겨 썼다는 이 문구는 대통령제 아래서 최종결정권자인 대통령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임기에 일어난 모든 잘못의 책임을 떠안는다는 의미다. 동시에 그런 약속으로써 상대를 함께하도록 설득하고 이끌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문구이기도 하다.

셀 수 없이 많은 이의 생명이 걸린 주제를 찬반에 따른, 혹은 진실게임을 벌일 문제로 여기는 대통령의 태도에는 상대를 설득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돼 있지 않다. 오직 옳음과 그름의 대결만 있을 뿐이다. 승과 패가 갈리는 필사의 대결 중인 그에게 의료개혁의 필요성과 의료현장의 위기 모두가 사실이라 인정토록 하는 건 지금으로선 아무리 많은 보도와 증언으로도 불가능해 보인다.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의 필요성이 절절하다고 해서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과장이나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 비록 잘못이 현장을 떠난 의사들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 후과를 현장에 남은 의료인과 시민들이 지금처럼 잔인하게 감당치 않도록 할 최종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그 책임을 관철해내는 게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이 정말 해야 할 일이다.

사실 명패의 문구는 최근 몇 번의 미국 대선에서도 종종 인용됐다. 재밌는 건 본래 의미를 뒤틀었단 점이다. 달변가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코로나19 시기 대통령이던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무책임한 대처를 두고 ‘The buck never stops there(그쪽에선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며 비꼬았다. 20년간 미국 철강노조(USW)를 이끈 레오 제라드 전 위원장 역시 온갖 추문에 모르쇠와 무데뽀로 일관하는 트럼프를 같은 문구로 꼬집었다.

결정에 책임을 진다는 우리 대통령의 각오가 거짓은 아니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책임이 단순히 집무실 책상 위에 머무는 것으로 끝날 리 없다. 당장 현장에서 고통받는 생명, 역대 최악으로 치달은 직역 간 갈등,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까지 모두 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이 영원히 책임져야 할 몫이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가 좋아하는 명패 속 문구는 조만간 비슷한 비아냥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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