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말 무슬림폭동, 그때 움직였다…남양의 이슬람화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6>]
동남아의 최대 종교는 이슬람이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이 사는 지역의 하나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인구를 가진 나라고,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동남아 모든 나라에서 이슬람은 중요한 종교다.
그러나 동남아를 ‘대표적’ 이슬람 지역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슬람 지역 중 발상지에서 가장 먼 곳이라서 전파 과정에서 많은 굴절이 있었을 것을 우선 짐작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다중성’을 앞서 살펴봤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173)
그 다중성이 빚어지는 과정을 이제 한 차례 살펴보겠다.
‘초기 이슬람 정복’의 평화로운 과정
수마트라섬에서 무슬림 집단의 거주 흔적은 7세기 후반(674년경)부터 나타난 것이 있으나 남양 사회의 주요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은 13세기 이후의 일이다. 활발한 교역로 때문에 접촉은 일찍 시작했어도 자리 잡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대륙세력의 항해활동이 10세기 이후에 시작된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0세기 이전에 인도양을 항행한 것은 남양인의 배였고, 서방 상인들도 그 배에 편승했다. 상인들 중에 더러 남양에 자리 잡는 사람들이 있는 정도였고, 종교의 지속적 전파는 시작되지 않았다.
인도의 이슬람화 상황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초기에 남양에 온 서방 상인 중 인도 출신이 페르시아나 아랍 출신보다 많았다. 그런데 인도의 이슬람화는 11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이슬람 정복’은 622년 이슬람 창설에서 750년 옴미아드 칼리프조의 종말까지 이슬람세계가 대서양 연안(스페인, 모로코)과 인도양 연안(페르시아)까지 자리 잡은 과정이다. 앙드레 윙크는 〈알-힌드, 인도-이슬람 세계의 형성〉(1권)에서 이 광대한 지역이 이슬람 발상지인 아라비아반도와 대체로 비슷한 자연조건을 가진 점을 지적한다. ‘정복’의 뚜렷한 의지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진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초기 이슬람은 정복 대상이던 비잔틴제국이나 사산제국과 달리 종교적 관용을 내세웠다. 정복된 백성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고 ‘딤미(dhimmi)’의 신분을 주어 조세 부과 등에만 약간의 차이를 두었다. 옴미아드 칼리프조가 끝날 때 판도 내 주민 중 무슬림 비율은 10%가 못 되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본다.
이후 약 300년은 이슬람제국의 ‘내부 선교’ 기간인 셈이다. 11세기까지 판도는 크게 넓혀지지 않았는데 판도 내 무슬림 비율이 70%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자연조건을 가진 지역으로 퍼져나가 새로운 성격의 이슬람 사회를 만들 여건이 갖춰진 것이다. 인도의 이슬람화는 이 단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슬람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
한국사회에서 이슬람에 관한 인식이 빈약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겹쳐져 있다. 하나는 경험 자체가 적은 것이고, 또 하나는 유럽인의 오랜 편견이 유입된 것이다. 십자군 이래 유럽인은 최대-최악의 적으로 이슬람을 정형화했고, 그 악마화된 모습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학-예술작품에 재생산되었다.
‘문명교섭사’를 공부한다고 해 온 필자의 눈에도 이슬람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교섭의 주체로 중국과 유럽만을 바라보던 수십 년 동안 이슬람에 관한 책을 본 것이 두어 권에 불과하다. 정년의 나이(65세)가 지나 평생의 공부를 정리한다고 〈오랑캐의 역사〉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이슬람 공부를 제대로 시작했다.
그 작업에 착수한 후 6년 동안 수십 권 책을 찾아 읽으면서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절감했다. 전문 연구자들의 관점이 근년 큰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다. 21세기 들어 이 변화가 빨라진 것을 보면 아마 냉전 종식이 계기가 된 것 같다.
연구 동향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 중인 만큼 아직도 이슬람의 확실한 모습을 그리기 힘들다. 그러나 종래의 편견을 극복하는 데 꼭 필요한 포인트들은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포인트로 보이는 것은 이슬람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기독교의 다양성은 우리 사회에도 잘 알려져 있다. 배타적-호전적인 모습에서 포용적-평화 지향적인 모습까지 다양한 모습의 기독교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보아 왔다. 하나의 종교로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 다른 교파들의 모습을 보아 왔다. 그에 못지않은 다양한 모습을 이슬람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건조지역, 농업지역, 해양지역의 서로 다른 이슬람
윙크는 11세기 이후 형성된 ‘알-힌드’, 즉 인도의 이슬람이 종래의 이슬람과 다른 특성을 보인 사실을 중시한다. 북아프리카에서 페르시아까지, 이슬람이 오랫동안 퍼져 있던 건조 지역과 자연조건이 다른 데서 그 차이가 나온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후에 전파된 남양 지역 역시 고유의 자연조건에 따라 새로운 모습의 이슬람을 빚어냈을 것이다.
11세기 이전의 이슬람세계는 소규모 농업지대가 간간이 끼어 있는 건조지역이었다. 알-힌드는 초대형 곡창을 낀 지역이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남양은 해양지역이었다. 후에 남양의 대형 곡창으로 자라날 큰 강의 하구 일대는 아직 농업 개발이 안 된 상태였다.
남양은 생산력에 비해 교역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교역에 기반을 둔 해안지대가 내륙의 농업지대와 나란히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슬람 전파는 당연히 해안의 교역기지에서 시작되었다. 이슬람 상인들과 교류하는 교역 종사자들이 개인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초기 단계에서는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이 적었다. 많은 지배층이 대거 개종하는 14세기부터 이슬람의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다.
1292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페르시아로 가는 길에 수마트라섬 북부에서 몇 달 체류할 때 술탄국의 존재를 기록했다. 항구도시 지배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 지역에 두 개 술탄국이 존재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파사이는 1267년 개종한 것으로 전해지고, 페를락은 9세기에 개종한 것으로 전해지나 실제로는 13세기 말에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남양 이슬람의 독특한 초기 모습은 항구도시 술탄국으로 나타났다. 그 지배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는지 직접 확인할 길은 없으나 교역항의 발전을 위한 마음은 정황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항구의 운영방식으로 뒷받침되는 추측이다. 15세기 말라카를 보면 술탄이 네 명의 샤반다르(shahbandar, 항구장관)를 임명해 항구 운영을 맡겼는데, 이슬람 방면, 벵골 방면, 중국 방면과 남양 일대의 상인들을 각각 대표하는 역할이었다. 이슬람의 채택은 기존 구도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탬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무슬림의 남양 이주
이슬람은 남양의 서쪽에서 일어난 종교다. 당연히 서쪽으로부터의 전파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동쪽, 중국 방면으로부터의 전파도 생각하게 되었다. 정화 함대의 활동이 남양의 이슬람 확산에 도움이 된 측면들이 눈에 띄는데,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슬람권 상인들이 교역로를 따라 자리 잡으면서 종교 전파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상인들이 어떤 곳에 제일 많이 자리 잡았을까? 당연히 교역 활동을 활발히 벌일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양보다 중국에 많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중국은 시장이 큰 곳이고 남양은 지나가는 길일 뿐이기 때문이다.
8-9세기 당나라에는 서역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때는 해로보다 육로가(실크로드) 활발해서 중국 서북부에 서역인의 거주가 많았다. 878년 황소(黃巢)의 난 때 광주(廣州)에서 십여만 명의 외국인(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 등)이 학살당했다는 아랍 측 기록들이 있는데, 그 상황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로가 활발해지는 것은 11세기 이후 송나라 때의 일인데, 9세기 광주에 그렇게 많은 서방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878년의 ‘광주 학살’의 실상은 분명하지 않지만, 원나라 말 천주(泉州)의 무슬림폭동(波斯戍兵之亂, 1357-1366)은 분명하다. 당시 중국의 무슬림 인구는 약 4백만 명으로 추정되고, 서북 지역과 동남 지역에 집중해 있었다. 색목인(色目人)의 위치가 불안해진 원-명 교체기에 중국을 떠난 무슬림 중 다수가 남양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정확한 인구를 파악할 근거는 없으나 정황으로 볼 때 14세기에 중국에서 남양으로 옮겨간 무슬림은 수십만 명에 달했을 것 같다. 서쪽으로부터 남양에 들어와 있던 무슬림은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남양의 이슬람화에 중국 방면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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