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할머니의 유쾌한 일상
“가혹한 환경에서 화전을 일궈 생을 살아오며 산이라는 초록색 도화지에 밭이라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 자체가 예술의 씨앗이었습니다.”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에 자리한 ‘할매발전소’ 소개 글이다. 1949년 설립된 황둔초등학교 창평분교였던 교정은 2022년 할매발전소 간판을 달고 동네 할머니들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할머니들은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고무찰흙으로 귀여운 오브제를 만들곤 한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온 마을 할머니들과 그들의 애환이 쑥쑥 자라났을 ‘밭’에 집중한 개관기념 전시 〈Mother’s Mother_알아차림 전(田)〉은 할머니들의 생애사 기록으로 채워졌다. 신림 문화예술의 거점 공간으로 거듭난 할매발전소는 지친 사람들에게 할머니의 삶의 지혜와 위안을 전하고, 이름 없이 살아온 할머니에게 존중과 생기를 전하며 세대의 간극을 넘어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가교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이 따뜻한 공간을 운영하는 팀은 ‘로컬리티:’다. 2019년부터 지역사회의 작고 고귀한 삶을 조명하고, 지역의 고유 색깔이 담긴 콘텐츠를 제작하는 팀이다.
영상과 디자인 작업을 비롯한 비주얼 디렉팅을 담당하는 김영채 디렉터, 문학을 중심으로 텍스트 콘텐츠를 담당하는 석양정 작가, 문화예술기획과 지역민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심지혜 학예사로 이뤄져 있다. “10년 전에 일로 만난 동갑내기 친구 사이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싶은 지역사회를 만들어보자는 꿈을 품고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서 콘텐츠를 찾다가 자연스럽게 로컬 기획자로서 삶을 이어가게 됐습니다.”세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처음 지역 콘텐츠를 기획할 땐 밥상과 옥수수, 학교 같은 유형 자원이 먼저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만히 마을을 들여다보니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인, 그중에서도 할머니들이 이 지역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그렇게 다시 들여다본 마을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는 할머니였다. “마을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할머니들이 우주의 원리를 꿰뚫고 있었고, 할머니가 일군 텃밭도 자연 예술이자 저마다의 철학과 안목이 담긴 창작으로 보였습니다.”김영채가 말했다. 지역에서는 도시 발전을 위해 노인이 당장 해결돼야 할 문제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액티브 시니어’와 조부모 세대가 즐기던 문화를 좋아하는 2030 청년들의 트렌드를 일컫는 ‘할매니얼’ 같은 문화 현상이 존재하는 한편, 여전히 노인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로컬리티:가 할머니들의 작업을 진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저 할머니의 삶 자체, 존재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소통이 이어진다면 지역에 사는 노인 세대가 더욱 능동적인 주체로서 지역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하는 구성원으로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심지혜의 말이다.
로컬리티:는 2021년 할머니가 차린 밥상을 통해 생과 삶을 엿보는 세미 다큐멘터리 영상 〈할머니의 잘 지은 밥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로컬 콘텐츠 제작활동을 확장해 왔다. 그 일환으로 올해의 기획 전시 〈내 이름에게: 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가 9월 13일부터 16일간 할매발전소에서 열린다. 전시 프로젝트 중 하나인 〈여든 너머〉는 “쭈글쭈글해서 사진 찍기 싫어”라면서도 예쁜 꽃과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앞에서는 사진을 먼저 청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피어난 궁금증, ‘할머니가 남기고 싶은 자신의 사진은 어떤 모습일까?’에서 출발했다.
피사체는 로컬리티:와 사진가 김상곤, 브랜드 ‘아보포포’ 대표이자 스타일리스트 정소정의 시각으로 포착한 신림면 토박이 할머니 여섯 명. 밭농사가 특기이고 부녀회장 20년 경력의 장춘매, 꽃씨 할머니라 불리는 서월이, 집 마당이 이국적인 수종으로 가득한 이숙자, 담배 농사와 인삼 농사를 지어온 안호녀, 18세에 신림면으로 시집와 둘도 없는 친구로 수십 년을 지낸 임영환 · 이금선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고운 화장과 예쁜 옷으로 할머니 각자의 개성과 직업을 살려 화보가 완성됐다. 의상은 스타일리스트 정소정이 직접 마련한 것들이다. 촬영을 진행한 김상곤 사진가는 할머니 화보 촬영 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본격적인 스타일링을 앞두고 기다리는 할머니들을 위해 직접 리모컨을 눌러 찍는 셀프 인물 촬영을 마련했죠. 머리와 화장이 안 된 상태라 그런지 다들 서로에게 촬영을 미루시더군요. ‘지금 몰골이 너무 흉해! 안 찍어!’라며 투정을 부리다가도 막상 리모컨을 쥐여드리면 하하호호 촬영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요.”그러곤 덧붙였다. “촬영 전에 촬영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신림면으로 향했어요. 방문하는 집마다 할머니들이 자꾸 먹을 걸 내어주셨죠. 서월이 할머니는 예쁘게 참외를 깎아주셨어요. 장춘매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 고생하는 스태프가 안쓰러웠는지 국수를 끓여주셨죠. 마지못해 화장대에 앉으시곤 “사진 찍을 테니까 나 영정사진 하나만 찍어줘”라며 5만 원을 손에 쥐여주셨어요. 그 사진은 곱게 다듬어 할머니께 전달했습니다.”여러 차례 수술과 건강 악화로 수척해진 장춘매 할머니는 사진 찍는 당일에도 밭일을 핑계 삼아 시간을 미루셨다고 한다. 김상곤은 할머니의 이름을 빛내는 〈여든 너머〉를 촬영하며 다시 사진가라는 직업에 대한 가치와 애정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여기에 팀 로컬리티:가 한 마디 더했다. “그날 스태프들은 모두 귀염둥이 어린 손주가 돼 할머니들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게 해드렸고, 세상에서 가장 밝게 웃는 할머니 사진을 남겼습니다.” 길도, 글도, 전기도, 이름 석 자도, 어느 것 하나 쉽게 허락되지 않아 깜깜하기만 했던 시절을 지나 여든이 넘어 한 글자 한 글자 써보는 할머니들. 촬영 날 모여서 ‘꺄르르 꺄르르’ 떠들며 “너 화장한 김에 영정사진 찍어! 난 다음에 찍을래”라던 할머니들. 가슴 철렁하면서도 한평생을 뜨겁게 살아냈기에 할 수 있는 말. 평생 무언가를 키워온 할머니가 생애에 걸쳐 일궈낸 숙련된 기술과 자연을 대하는 지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짜 소중한 것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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