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강간 당하느니 장교의 애인으로~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4. 9. 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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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모두가 외면한 패전국 독일 여성들의 비명
일러스트 : 강유나
“오늘 밤 당신의 침대에서 자도 될까요?”

남루한 차림의 여성이 군인 장교 방문을 두들겼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뚫고 간간이 들려오는 총성. 도시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서른이 안 돼 보이는 여성의 동공은 위태로이 흔들린다.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에게 쫓기는 모습. 장교는 동정심이 일면서도, 동시에 오늘 밤에 있을 쾌락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시지요.”

여성의 방문은 자발적이나, 한편으로는 피치 못할 선택이기도 했다. 도시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집단 강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소련이 점령한 베를린에서였다. 소련 군인들은 독일 여성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독일 여성 한 명을 소련 군인 23명이 줄 서서 강간했을 정도다. 사는 방법은 단 하나. 간부급 군인의 애인이 되는 것. 매일 밤 그의 성욕을 해결해주고, 식량도 얻어서 돌아갔다. 다른 군인들은 간부 애인을 건드릴 수 없었다. 집단 강간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한 명에게만 강간당하기로 한 선택이었다.

1945년 5월은 연합군 승리가 가시화되는 시점이었다. 역사에서는 이날을 인류의 승리로 기록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베를린에서 끔찍한 강간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그날의 베를린을 돌아보는 이유는 ‘전범국’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이 인간의 영혼을 짓밟는 방식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1945년 5월 베를린에 펼쳐진 지옥도

베를린 여성 강간 피해, 10만명 추산

1945년 4월 30일, 한 사내가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 독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전쟁은 끝나는 듯 보였으나, 베를린에서는 새로운 지옥도가 열렸다. 소련군의 지독한 보복전이 시작됐다. 베를린은 전쟁의 참상을 그제서야 처음 목도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지 5년이 지난 뒤에서였다.

전쟁은 언제나 그렇듯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의 보복은 가장 약한 고리, 여성을 향했다. 집단 강간이 수시로 주기적으로 벌어졌다. 고된 전쟁의 보상이라도 되는 듯, 마치 전리품을 취하듯, 그들은 여성을 수시로 범했다. 딸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까지. 길거리에 보이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표적이 됐다.

매일 밤 이어지는 강간에 여성들은 제 살 도리를 찾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독일 남성에게서는 더 이상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가급적 높은 계급 소련 군인에게 정기적으로 몸을 바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베를린에 식량난이 닥치면서 여성의 위기는 한층 더해졌다. 어차피 강간을 당할 바에 음식이라도 구하자는 마음에 매춘을 택하는 여성도 많아졌다. 매춘이라는 이름의 강간이 횡행했다. 베를린의 한 의사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베를린 여성 10만명이 강간당했으며, 이 중 1만명이 죽었다. 대부분 자살이었다.”

독일 전체로 범위를 넓혀보면 피해자는 200만명으로 늘어난다.

역사학자 안토니 비버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집단 강간”이라고 정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 사이를 걷고 있는 베를린 여성. 영화 ‘베를린의 여인’의 한 장면이다. (imdb)
소련군은 왜 베를린 여성을 겁탈했을까

동부 전선에서 펼쳐진 독일 대학살 보복심리

유독 소련이 독일 민간인에게 대대적인 인권 유린을 행한 배경에는 보복심리가 자리한다. 앞서 독일이 소련을 침략할 때 집단 강간을 비롯한 대학살을 벌였기 때문이다.

독일 나치 정권은 당초부터 소련의 공산화가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아시다시피 독일은 대표적 유대인 혐오 국가다. 소련을 공격했을 때, 독일은 다른 국가에서보다 더욱 공격적이었고, 더욱 야만적이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여성과 아이도 학살 대상에 포함됐다. 몸이 칼로 난자당한 여성의 시체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나치가 조직적으로 강간을 정복 무기로 삼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폴란드, 소련 등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여성을 표적으로 삼았다. 일반 군인은 점령지 여성들에게 죄책감 없이 손을 댔다. 장교를 위한 윤락 시설을 만들고 소련과 폴란드 여성을 강제로 밀어넣었다. 강간으로 임신한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장소도 동부 전선이었다. 프랑스나 벨기에 등 서부 전선에서도 끔찍한 범죄가 잇따랐지만 동부 전선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독일 군인들은 당당하게 외치곤 했다. “너희들은 우리 히틀러 군대를 위한 창녀”라고.

언론인이자 작가로 이 주제를 연구한 수잔 브라운밀러는 “나치는 유대인, 러시아인, 폴란드인과 같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파괴하려는 목표에서 강간을 이용했다”고 했다. 독일 여성인권 운동가인 우르술라 셸레는 소련에서 나치에 의한 강간이 약 1000만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때 태어난 사생아만 해도 100만명에 달한다.

다시 베를린으로 눈을 돌려본다. 도시를 점령한 소련 군인은 자신들의 행위가 조국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을 향한 끔찍한 범죄라는 사실 앞에서 ‘도덕’이라는 눈을 감아버린 것.

소련의 점령이 점차 안정화가 될 무렵, 포로로 잡혀간 독일 남성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들을 마주한 건 강간당한 처와 자식이었다. 어린애처럼 울부짖는 남편, 강간당한 약혼녀에게 파혼을 선언한 젊은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여성을 비난하는 가족들까지. 한 독일 여성은 남편 총에 맞아 죽었다. “연합군 병사와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이유에서다. 어떤 남성들은 도시를 지킨 여성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소련군 창녀야.” 끔찍한 강간을 견딘 그녀들은 다시 한번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여성에게는 모든 전쟁의 역사가 ‘패전’

독일 남성에게도 또 멸시받은 베를린 여성

베를린의 여성들은 침묵을 지켰다. 국제사회에서는 전범 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내부적으로는 연합군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누구도 그들을 인권 측면으로 바라본 사람은 없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나치 독일이 본인들의 고통을 말하는 건 사실 금기에 가까웠다.

세계가 냉전에 접어들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동독은 우방국 소련의 만행을 들출 수 없었다. 사회주의 세계에서 소련은 ‘해방군’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서유럽 역시 연합군의 만행을 고발할 만큼 진실된 사람은 없었다. 사회주의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언제나 베를린의 여성들은 ‘잘못된 피해자(wrong victims)’였다.

당시 베를린에 남아 있던 한 여성의 일기가 1954년 발간됐지만 역시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3년 ‘베를린의 한 여인(Eine Frau in Berlin)’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면서 그제서야 인권 측면에서 베를린 여성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인류사에서 여성 세계에는 ‘승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승리의 날’이라는 팡파르 소리에, 여성의 비명이 묻힌 것은 아니었는지. 역사의 기록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승자의 역사만 혹은 남성의 기록만 주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5호 (2024.09.03~2024.09.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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