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 포기한 채 "죽게 도와줘"…제자에 부탁한 교수의 고독
"내가 죽는 걸 도와줘"
위암 2기 판정을 받은 영문과 교수 벨라에겐 아무도 없다. 부모는 죽었고, 형제는 없고, 친구들과 멀어진 지 오래다. "고양이도 없는" 벨라에게 남은 것은 책뿐이다.
소설가이기도 한 벨라는 17년간 소설을 쓰지 못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계 걱정은 덜었지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은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언젠간 나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글을 쓸 것"이라고 말하는 제자 크리스토퍼를 만나기 전까지.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연출 박천휴)는 문학 교수 벨라와 제자 크리스토퍼의 이야기다. 이들은 문학을 통해 서로의 고독을 발견하고 아픔을 나눈다. 완벽한 소설을 쓰겠다는 강박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벨라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크리스토퍼는 벨라의 소설을 읽으며 '이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는다.
벨라와 크리스토퍼의 대화는 문학적 레퍼런스로 꽉 차 있다. 둘은 모두 자전적 소설을 썼고, 데이비드 월리스와 표토르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한다. "주말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제임스 볼드윈이나 데니스 존슨을 읽을 사람"과 함께 살고 싶었던 벨라는 "메리 셸리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프랑켄슈타인'을 썼다"며 자신의 나이가 마냥 어리지 않음을 항변하는 크리스토퍼에게 빠져든다.
이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성적 호감인지, 극은 속 시원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오랜 시간 고독에 익숙해진 벨라와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이상주의자 크리스토퍼에게 문학이라는 삶의 목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성적으로 끌리는 이성과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였을 터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벨라는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크리스토퍼에게 자신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문학이 삶의 전부였던 벨라는, 그렇게 자신을 꼭 닮은 제자에게 마지막 순간을 맡긴다. 이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 채.
문학 교수와 제자가 주인공인 만큼 극에 문학적 알레고리가 많다.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샐린저 등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할 계획을 세우는 교수 '벨라'는 배우 문소리·서재희가 맡았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동경하는 대학생 크리스토퍼는 배우 이현우·강승호·이석준이 연기한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일 테노레' '번지점프를 하다'를 쓴 박천휴 작가의 첫 연출작이다.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는 2020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벨라'역의 매리 루이즈 파커에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작품은 그해 작품상 포함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공연은 10월 27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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