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여사님'으로 불리는 그녀의 이야기

김상목 2024. 9. 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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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딸에 대하여>

[김상목 기자]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나'는 노인 요양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혼자 살고 있다. 장성한 딸은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며 예전에 독립한 상태다. 남편과는 사별한 것으로 보인다. 교외에 자가주택이 있고, 2층에는 젊은 부부가 전세로 들어와 있다. 직장에선 성실히 일하며 동료들과 관계도 원만한 편이다. 이쯤 되면 그럭저럭 별다른 걱정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삶이다.

하지만 나에겐 요즘 이것저것 근심이 생겼다. 직장에서 돌보던 어르신은 치매 증세가 조금씩 심해지고, 병원에선 너무 헌신해도 말이 나온다며 적당히 하라고 압박한다. 독립해 나가 살던 딸은 집주인과의 마찰로 당장 짐을 빼야만 할 상황이다. 엄마에게 대출을 문의해보라 하지만 대출 조건에 미달하는 바람에 달리 방도가 없다.

딸은 결국 당분간 내 집에서 생활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같이 살던 딸의 친구도 함께 들어와야 한다는 것. 나는 의아스럽고 타인을 집에 들이는 게 불편하기만 하다.

그렇게 딸과 딸의 친구와 함께 어색한 동거생활이 시작된다. 나는 곧 둘이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거북하기 그지없다. 엄마로서 딸이 뭐 하고 다니는지 의심이 불거진다. 이것저것 알아본다. 남들에겐 '교수' 딸 뒀다고 부러움을 사지만 실상은 '보따리 장사'라 불리는 시간강사인 딸은, 동료 강사의 부당해고 문제를 대학에 항의하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나는 왜 남의 일에 오지랖 부리냐며 따지지만, 딸은 엄마에게 또박또박 대들면서 이게 다 엄마의 어릴 적 가르침이라 항변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공부를 너무 많이 시켜서 저런가 하고 한숨만 나올 뿐이다.

딸 일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지만, 그걸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병원에선 이제 후원금도 끊기게 된 내가 모시던 어르신을 개인 병실에서 다인실로 옮기자 하고, 기저귀와 수건도 너무 많이 쓴다며 타박한다. 이러다 벽지의 치매 환자 집단수용시설로 보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어르신과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말 그대로 '남'이다.

여기저기 찾아다녀 보고, 병원 관리자에게도 따져 묻지만, 오히려 다른 속셈이 있는 것 아니냐며 의심을 살 뿐이다. 딸은 계속 복직 투쟁한다며 걱정만 만들고, 딸의 애인을 보면 미운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속이 뒤집히기만 한다. 나는 과연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청개구리 같은 딸, 엄마의 근심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세대를 초월한 지형도를 그리려는 야심작이다.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원작소설의 서사에 힘입어 영화는 시종일관 주인공인 중년여성 '나'의 시선으로 느릿하게 진행되는 것만 같지만, 마치 큰 강이 상류의 가파른 물살에서 하류로 갈수록 천천히 흐르는 대신 아득하게 확장되는 형태로 다양한 세대와 쟁점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움직인다.

대개 이름 없는 자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주제의식을 확고히 하는 여성 서사의 경향을 거스르듯 <딸에 대하여>에서 주인공은 시종일관 '나'로만, 그리고 '엄마'로만 설정된다.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보통 '00엄마' 혹은 '00댁'에서 고유한 본명을 되찾는 게 여성 서사가 취하는 방법론 아니던가.

이 영화는 정반대로 나아간다. 마지막 크레디트에도 주인공은 그저 '엄마'로만 표기된다. 하지만 분명히 본명이 있다. 단 한 번, 고용지원센터 상담에서 주인공의 실명이 드러난다.

이름을 잃지 않은 주인공은 하지만 영화 내내 '엄마'와 '여사님' 사이를 오갈 따름이다. 주인공 또한 그런 상황을 전혀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은 없다. 딸과의 관계에선 당연히 내가 엄마이니까, 그리고 직장인 병원에선 동료들처럼 '여사님'으로 호명되는 게 그리 어색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그는 별 불만이나 불편 없이 경제적으로 자립한 현재 삶에 만족하며 늙어가는 길을 택했다. 병원에서 그가 목격하는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방치된 어르신들에 비하면 이만하면 부족할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만의 세계를 붕괴시키는 균열은 이중으로 동시에 닥치고 말았다.

병원에서 전담해 돌보는 어르신은 왕년에 명망 있던 작가라고 한다. 가족이 없지만, 재단을 만들어 세계 곳곳의 고아들을 돌보고 후원해 왔다. 그 때문에 종종 미디어에서 방문해 인터뷰도 하고 명사 대접을 받았다지만, 내가 맡은 이후로는 재단의 관심도 뜸해지고 왕래도 거의 없어졌다.

그렇게 명성 높던 이도 의지할 가족이 없으면 저렇게 되는 걸까 하고 나 역시 노후를 상상하며 근심이 들던 참이다.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공부 잘하던 딸은 안정된 자리를 잡지도 못하면서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딸에게 노후 부양을 기대하지 못할 건 둘째 치고, 저러다 쟤는 내가 죽고 나면 어쩌나 아찔해질 지경인 게 이중삼중으로 속을 뒤집어놓는다.

가방끈 긴 딸은 엄마의 근심을 귓등으로 흘리기만 한다. 배운 건 많은데 그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 더 속이 상한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주면 좋으련만, 어쩌다 하필 세상에서 손가락질당하는 그런 관계에 빠져든 걸까. 저러다 나이 먹으면 내가 돌보는 어르신 꼴 나지 않을까? 엄마 마음은 미어질 따름이다. 하지만 자식은 말을 듣지 않을 뿐더러, 학교와의 충돌로 갈수록 더 불안하게 만들기만 한다. 이러다 내가 먼저 쓰러질 지경이다.

미래의 가족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영화는 그렇게 엄마의 입장에서 어쩌면 나의 미래가 될 어르신의 몰락,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노동과 사랑을 동시에 껴안은 딸의 수난을 동시에 경험하며 변화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여러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런 일련의 굵직한 사건들이 극적으로 긴장감을 불러오기보다는 내 머릿속에서 두 단계쯤 걸러진 다음 생각으로 정리되듯 표현된다.

이 때문에 긴장감 넘치는 서술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실망할 수 있지만, '영상소설'을 감상하듯 문장과 풍경을 조화해가면서 관람하는 이들에겐 곱씹을 여유를 선사하며 흘러가는 전개 방식이 인상 깊게 남을 테다.

나는 시종일관 '엄마'로 표기되지만, 반대로 딸과 딸의 연인은 본명이 아니라 자신들끼리 정한 애칭으로 서로 호명한다. 심지어 나에게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요청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에 애인과의 암호처럼 붙인 별명이라니. 엄마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실제로 나는 이에 승복하는 기색은 드러내지 않지만, 딸의 애인과 굳이 이 문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지도 않게 된다. 경험하지 않는 것을 기성세대가 된 지 오래인 '나'가 수용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내가 애 엄마라는 영역 분쟁을 벌일 생각도 없으니 자기들끼리 부르는 걸 일일이 타박하진 않으련다. 이 정도가 현실적인 우리 시대 엄마들의 '선'일 것이다.

딸과 딸의 애인은 처음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엄마들 마음이란 게 대단한 걸 바라지도 않는데, 어째 저들은 청개구리 짓만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내가 바라던 평범한 역할과 소소한 삶의 행복은 그들의 관계로도 가능하더라는 체험을 더불어 겪으면서 생각은 조금씩 변해간다. 엄마의 '해방일지'처럼, 그저 평범하고 다만 조금 더 연민이 많았을 뿐이던 주인공이 변모해가는 과정은 극적 각성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점진적으로 진전된다.

그런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겉으로는 아주 소소한 변화만 확인될 뿐이다. 그러나 '나'의 삶은 분명히 달라졌다. 나와 딸까지 내가 모시다 병원과 재단이 헌신짝처럼 버린 어르신의 전철을 밟지 않을지 공포에 떨던 대신, <이갈리아의 딸들>이나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상상하던 모계 공동체 혹은 현대판 아마조네스 같은 형태를 경험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아닌, 실제로 '정상 가족'이란 틀에만 갇히지 않는 (대안) 가족이 가능하다는 일상의 체험은 무엇보다 힘이 세다. 정상 가족이라 해도 3대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기 힘든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나는 여성들의 힘과 노력으로 그게 구현 가능하다는 걸 목격한 것이다. 남의 일 불구경하다 나에게 닥친 상황에 방황하던 주인공이 다시 낯선 타인에게 연대의 시선을 돌리는 집중과 확장의 시야 처리가 기승전결과 자연스럽게 연동한다.

영화는 화끈하고 후련한 전개 대신에 유유히 흘러가는 변화의 도상에서 파생되는 세밀한 조각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주인공들은 정상 가족이라 강요되는 형태 너머에 다른 가족이 가능함을 구현하지만, 그 대안적인 모델은 절대로 그들만의 '게토'가 아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노동이 일반적으로 겪는 주변부의 소외 역시 충실하게 구현해 본 작품의 사려 깊은 태도를 증명한다.

2층의 다둥이 젊은 부부는 중반까지는 엄마로서 딸의 소꿉장난 같은 기행(?)을 근심하던 입장에선 서로 배치되는 것처럼 그려졌지만, 충돌이나 배척 없이 그저 섞여서 어울려 살면 되는 이웃으로 어느 틈에 섞여든다. 선글라스 끼고 조금 낯선 존재들을 벽으로 차단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가능한 변화들이다.
 영화 <딸에 대하여> 포스터 이미지
ⓒ 찬란
[작품정보]

딸에 대하여
Concerning My Daughter
2023 한국 드라마
2024.09.04. 개봉 105분 12세 관람가
감독 이미랑
주연 오민애(엄마 역), 허진(제희 역), 임세미(그린 역), 하윤경(레인 역)
출연 강애심(최여사 역), 장선(정미 역), 이창훈(권과장 역), 양조아(사회복지사 역),
오만석(이제희재단사무장 역), 이다영(윗집여자 역), 서석규(윗집남자 역),
한혜지(윤지 역), 기윤(기자1 역), 이슬이(기자2 역)
원작 김혜진 소설 <딸에 대하여>
제공/제작 아토
배급 찬란
공동배급 스튜디오 에이드·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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