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 마광수를 생각하다
[김성호 기자]
기인이라 불린 이가 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라고도 불렸다. 변태라거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색을 밝히는 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선 출석에 관대하고 오로지 문장으로 학점을 베푼다는 소문으로 더욱 유명했을 수도 있겠다. 5일, 7년 전 세상을 등진 마광수 이야기다.
필화라 하기도 민망한 <즐거운 사라> 사건은 학자이자 작가였던 마광수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지금 보자면 어처구니없는 이 사건은 소설이 너무 야하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형법에 저촉되는 음란물을 출판해 내놓았다며 1992년 10월 29일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던 도중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한 일이다. 사건은 결국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징역형이 선고되기에 이른다.
사건 중, 또 사건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까지도 마광수에겐 보잘 것 없고 음란하기만 한 글을 쓰는 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학계에서 한 자리를 꿰찬 이들은 물론, 이문열과 같이 당대 문단의 거물이라 할 만한 이까지도 마광수를 향해 날 선 비판을 내어놓았다. 지금 보면 참담하기만 한 당대의 언론 또한 그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데 한 축을 담당했는데, 마광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온 세상이 저를 저버렸다 여길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그러나 역경은 작가에게 역경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작가가 역경으로부터 걸작을 내어놓으니, 때로 역경이 작가를 키우고, 그리하여 역경은 작가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드문 역경을 감당해야 했던 작가 마광수에게 그와 같은 고통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생각한다.
▲ 인간론 책 표지 |
ⓒ 책마루 |
<인간론>은 마광수의 철학에세이다. '인간'의 뒤에 '이론'을 뜻하는 론을 붙였단 것, 또 소개하는 문구에다 무려 철학이란 학문을 가져와 썼다는 것이 이 책에 대한 그의 기대며 평가를 알도록 한다. <인간론>은 그가 진행하던 수업에서 자주 읽게 되는 저술로, 교수이자 문인이며 유명인사이기도 한 마광수라는 이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싶은 이들이 자주 선택하는 책이다.
필자 또한 이 책을 그의 수업을 통하여 처음 읽었고, 그로부터 마광수라는 한 사람이 가진 생각과 태도, 철학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는 책이라 해도 좋겠다.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룬 24편의 글이 그가 발표한 소설과 시, 극본에 깔린 저자의 인간관이며 세계관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
온갖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육체와 정신의 진정한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이 비교적 깔끔한 구성 아래 들어찬 게 특징적이다. 날카로운 시각과 흥미로운 사유 사이로, 마광수의 저술에 기대하게 되는 것, 즉 과격하여 무리하게 느껴지는 논리 전개를 마주하는 재미 또한 상당하다.
책은 인간이 흔히 믿어지는 것과 달리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며, 동물과의 근본적인 구별점도 존재하지 않고, 나아가 우주의 중심도 아닐뿐더러, 역사 역시 발전하지 않는다 주장한다. 역사의 진보와 인간존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거부하는 파격적 서두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세를 고쳐 앉도록 할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살아가는 명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하는 식이다. 과연 마광수의 책다운 서두가 아닌가.
책은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 인간이 써온 역사, 법과 제도에 억눌린 사람들, 예술과 외설, 실존적 인식, 고난을 즐기는 인간, 야한 사랑, 관능적 상상의 효과, 몸의 상품성 등을 이야기한다. 한때는 파격적이었을 주장이 어느덧 익숙한 무엇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가 처음 논리를 펼쳤을 당시엔 결코 세상이 지금과 같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말하자면 그는 여러 부문에서 선구자적인 주장을 거듭한다.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수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을 읽는 재미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이따금은 진짜 통찰과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곧 '집단'을 의미하고 집단은 반드시 '획일화'를 지향하게 된다. 획일적 노력은 물론 처음엔 상당한 성과를 가져온다. 특히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는 합심이 잘 되어 일관성 있는 목표의 추진이 가능하다. 하지만 소기의 성과를 성취하여 어느 정도 안정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획일적 노력'만 강조하면 반드시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애써 이룩한 성과가 오히려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이 지나치리만큼 발달하여 생태계가 파괴되고 개개인의 인성이 말살되어 가는 현금에 있어 우리가 우선 배격해야 할 것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구시대의 명제 아래 인간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획일적 가치관만을 강요하려 드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중에서
▲ 즐거운 사라 책 표지 |
ⓒ 청하 |
사회적으로 성을 억압하고,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불필요하게 나눈다는 주장은 도리어 오늘에 이르러 상식이 됐다 해도 좋겠다. 인간의 청소년기를 지옥과 같다 주장하는 챕터에선 여러 사례를 들어 기성세대가 청소년기의 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저들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깊은 고민 없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금욕주의적 삶을 강요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삶의 방식도 아닌데 말이다. 미성년자가 성적으로 보호돼야 하는 존재라는 성 관념이 인류 역사 전체에서 얼마 되지 않으며, 열 살만 넘어도 성인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있었다는 주장의 일면은 오늘 돌아보아도 여전히 급진적인 구석이 없지 않다.
그러나 감추고 쉬쉬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성 담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오늘날 매체의 홍수 속에서 실현되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로부터 우리가 일찍이 우려한 도덕의 멸실이 그만큼 나타나고 있는가. 적극적인 성담론과 책임감이 별개의 것이 아니란 것을, 쉬쉬하는 대신 꺼내어 더욱 활발히 이야기해야만 왜곡 없이 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그는 거듭 강조한다.
물론 공감하는 대목보단 반박하고 싶어지는 부분이 훨씬 많은 책이다. 그것이 그대로 마광수를 읽는 즐거움이란 걸 그의 애독자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남이 듣기 좋은 글만 쓰는 것이 미덕이고 더 나은 작가인양 추켜세워지는 세태 가운데서, 웬만한 비판쯤엔 즐기듯 부딪치는 그의 글이 매력을 뿜어낸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의미가 없다며 배부른 돼지가 그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어떠한가. 평소 개인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저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일을 찾아 그에 투신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의미가 없다고 단정 짓는 과정이 파격적이고 이색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잘 먹고 잘 섹스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겠으나 또 다른 누구에겐 형이상학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최선의 삶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애써 철학이 먼저 가고 삶이 뒤따르는 삶을 평가절하하니, 이상이 저기 높이 있는 독자라면 문장 한 줄 한 줄마다 격렬히 드잡이질 하며 읽어내릴 수도 있겠다.
인류는 발전하는가, 멈춰섰는가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장 또한 흥미롭다. 저자는 '서양 중세기의 미신적 신권주의나 마녀사냥 식 도덕적 테러리즘이 현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역사발전론에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유일한 진실로 군림하던 시기의 압제에 비해 현대사회가 훨씬 개방되고 다양성이 인정된 사회라는 걸 부인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여전히 전과 같은 왜곡과 압제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가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한 일이 아닌가.
저자는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토인비의 유명한 명제를 언급하며 마치 그가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주장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토인비는 인류가 반드시 멸망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잦고, 그리하여 반복적인 흥망의 순환을 거쳐야 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역사를 앎으로써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문명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역사는 발전할 수 있다. 발전해야만 한다.
또한 예술과 문화를 성적인 본능적 욕구를 은밀하게 배설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엇으로 보는 태도는 다분히 마광수스러우면서도 편협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페티시의 대상이 다양하듯 인간의 욕구 역시 매우 다양한데 예술과 문화의 파생원인을 오직 성욕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편협하지 않은가. 몹시 흥미롭긴 해도 말이다.
<인간론>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상을 대하는 마광수 철학을 살필 수 있는 저술이다. 첫 판이 나오고 수십 년이 지나 고전축에 드는 이 저작은 여전히 그 사고의 파격에 있어 희귀하다 해도 좋을 만큼 흥미롭다. 놀랍게도 오늘의 서점가엔 마광수가 살고 쓰던 그 시절보다도 평범하고 안이한 글이 넘쳐난다. 더 자유로워졌으나 그 사상의 전개는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지지 않았는가를 떠올린다.
책 가운데 여러 면모를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조금의 불편에도 한없이 민감한 오늘의 독자에게 이곳이 어떻고 저곳이 저렇다며 뜯기고 씹힐 구석이 수두룩한 걸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의 작가는 더 자극적이고 파격적이며 거침없는 생각을 활자로 적지 못하게 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르고 만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류는 진보하지 않는다는 마광수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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