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상회 파리 날리게 한 '완도상회'를 아십니까
[완도신문 김남철]
최근 뉴라이트들이 전면 등장해 '역사전쟁'으로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역사관련 중요 기관에 뉴라이트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친일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일제의 식민 통치로 탄압받고 수탈당해야 했던 역사를 지우려 하고 있다. 자주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항일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친일과 반민족행위자들을 인정하려고 한다.
또한 완도는 타군에 비해 물가가 너무 비싸고 우리 물건을 팔지 못하고 있음에 분개하여 소비조합을 만들자고 호소하였고, 소비조합에서는 물건을 저가로 공급하고 이익을 배당하자고 청년들의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1주당 2원을 출자하는 단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인가를 받을 수가 없었다. 대안으로 소비조합 대신 개인잡화상 운영으로 계획을 바꿨다. 출연자 35명이 280원을 모아 1920년 9월 1일에 '완도상회'라는 상호로 문을 열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횡포에 쌓인 응어리가 되어 폭발적인 인기로 나타났고, 소비자들이 완도상회로 몰리면서 일본인 상회는 파리만 날리는 상태가 됐다. 일본 경찰과 검찰은 일본상품 불매운동이라는 말을 차마 쓸 수가 없었던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엉뚱한 죄명으로 김영현을 구속했다.
▲ 완도 항일의 아버지 소남 김영현 선생 |
ⓒ 완도신문 |
이렇게 각 면의 청년회가 구성되자 이를 하나로 묶는 완도청년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24년 8월 15일 정기총회가 열렸고, 상무위원에 나봉균·임재영·김장렬 등이, 강습위원으로는 강사원·나봉균·김장렬·김재경·임홍기·신태희·이흥세·우장승·김조헌 등이 선출됐다.
한편, 1920년대 중반은 완도청년회의 성격이 더욱 확고해지는 때였다. 완도청년회는 1925년 2월 완도무산청년회로 탈바꿈했다. 무산청년회는 청년운동의 근본방침으로서 "계급적 자각으로써 해방운동의 제일선에 설 역군을 양성키로 함"을 정했다.
무산청년회는 청년 교양을 위해 강연회·독서회·토론회·야학 등을 열고, 순회문고 및 신문 잡지 공동열람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완도청년연합회는 1927년 8월 28일 완도청년동맹으로 개편했다. 각 면의 청년회는 모두 해체되고 완도청년동맹의 산하로 들어가게 됐다.
완도청년동맹의 위원장은 신광희였으며, 상무위원으로서는 이월송 등이 활동했다. 완도청년동맹은 11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 강연을 열려고 준비하였으나 경찰에서 강연 전에 이를 금지하고 위원장 신광희와 상무위원 이월송, 신간회 완도지회 간사 최형천·정학균 등을 검속했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완도 청년들의 기개를 다시 기억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소비조합 사건으로 알려진 '완도상회'가 9월 1일에 시작됐다. 9월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지역의 항일운동을 알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각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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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남철씨는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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