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경와인셀라]모젤의 섬세한 떼루아가 빚은 '리슬링 변주곡'
獨 모젤의 섬세한 떼루아가 만든 리슬링의 정수
로버트 파커 100점, 총 22회…독일 와인 중 최다
당도 따라 와인 캡슐색 구분해 소비자 편리성 강조
편집자주
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양조 과정에서 포도밭의 차이를 끌어내 그 차이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점입니다."
마르쿠스 몰리터(Markus Molitor)는 하루도 빠짐없이 와인만 바라본다. 양조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지, 숙성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포도밭을 가꾸고 와인을 만드는 일 외에는 다른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그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셀라 고스트(Cellar Ghost, 와인 저장고의 유령)'라고 부른다.
그가 와인 저장고의 유령이 돼 온종일 와인에만 몰두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든 건 모젤(Mosel)이라는 지역의 떼루아(Terroir·포도밭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총체)와 그곳에서 길러내는 리슬링(Riesling)이 품고 있는 무한한 다양성과 가능성이다. 천의 얼굴을 지닌 리슬링은 끝없이 다양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포도 품종인데, 이를 알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고 관성대로 똑같은 스타일의 와인만 만들어내는 것은 일종의 의무 방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각기 다른 포도밭의 방향과 경사가 만들어내는 차이,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 날씨의 차이, 이러한 재배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포도의 숙성도와 캐릭터 차이. 마르쿠스 몰리터에게 이같은 차이는 와인의 일관성을 해치는 변수가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매력의 다양한 와인을 탄생시킬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다.
마르쿠스 몰리터는 매년 120종이 넘는 와인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프랑스 보르도의 와이너리 대부분이 메인 와인과 세컨드 와인 두 종을 생산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해진다. 다양한 변수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결과값을 즐기는 와인 메이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작한 와이너리, 독일 모젤의 '바인굿 마르쿠스 몰리터(Weingut Markus Molitor)'다.
떼루아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獨 리슬링 전성기 주도
몰리터 가문은 8대째 모젤 지역에서 포도밭을 경작해온 유서 깊은 집안이다. 하지만 마르쿠스 몰리터의 부모님 대에서 사정이 어려워지며 포도밭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고, 마르쿠스는 스무 살이던 1984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1.5헥타르(ha)의 작은 포도밭을 밑천으로 와인 업계에 뛰어들었다. 이후 떼루아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토대로 전 세계 와인 전문가에게 인정받고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는 와인을 꾸준히 선보였고, 설립 이후 40년이 흐른 현재는 포도밭 규모만 120ha에 이르는 등 독일 최고의 와인 산지인 모젤 지역에서도 최상급 와이너리로 성장했다.
마르쿠스 몰리터가 자리 잡은 모젤 지역의 포도밭은 대부분 모젤강을 끼고 급격한 경사지에 조성돼 있다. 가파른 계단식 구조로 인해 모든 작업은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같은 면적을 관리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은 평지의 밭과 비교해 5~10배에 이른다. 마르쿠스 몰리터의 포도밭 역시 30도 이상의 경사는 기본이고, 70도를 넘는 곳도 수두룩하다. 위르지거 뷔르츠가르텐(Urziger Wurzgarten) 같은 포도밭은 경사도가 85도에 이른다.
시간과 비용은 물론 노력이 곱절은 들어가지만, 모젤이 독일 최고의 산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포도 재배에서 이곳의 지형 조건이 주는 장점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가파른 경사면은 포도나무가 많은 일조량을 고르게 받을 수 있게 도와주며, 모젤강과 슬레이트(Slate)로 불리는 점판암 토양은 낮에는 태양열을 저장했다가 밤에는 다시 방출하는 보온효과를 제공해 포도가 급하지 않게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천천히 무르익은 모젤의 포도는 화려한 방향성과 미네랄 풍미를 지니게 되고, 섬세하고 우아한 와인이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한다.
마르쿠스 몰리터의 핵심 품종은 전체 포도밭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리슬링이다. 독일과 모젤을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 품종이기도 한 리슬링은 흰 꽃과 복숭아, 사과, 라임 등 섬세하고 화려한 아로마를 자랑하며, 고유의 풍미를 살리기 위해 젖산 발효나 오크통 사용도 거의 하지 않는다. 높은 산도로 인해 장기 숙성이 가능하며, 이 과정에서 복합적이고 희귀한 숙성 향으로 발전한다. 리슬링은 토양의 특성에도 민감한 편인데, 무거운 점토 토양에선 감귤류 향이, 붉은 사암에선 살구 맛이, 점판암 토양에선 미네랄 풍미가 강조된다. 이러한 이유로 리슬링은 떼루아의 특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품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르쿠스 몰리터는 포도밭과 기후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리슬링이 진정한 떼루아 와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최적의 품종이라고 판단했다. 척박하고 배수가 잘되며 일교차가 큰 포도밭에 식재된 리슬링은 늦가을의 햇살을 충분히 받으며 복합적인 풍미를 발전시키는데, 이로 인해 개화부터 포도 수확까지 걸리는 기간이 보통 150일 정도로 상당히 길다.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가 보통 100일 정도임을 고려하면 거의 1.5배 수준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긴 시간을 견뎌 내며 최상의 품질을 완성하는 것이다.
선별 수확의 마스터…캡슐 색상 구분으로 소비자 편의↑우량 품종인 리슬링은 뛰어난 품질로 인해 드라이부터 스위트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마르쿠스 몰리터도 이러한 리슬링의 잠재력을 토대로 포도밭과 빈티지의 특성을 반영해 다채로운 와인을 생산한다. 와인 양조에 앞서 포도 수확은 최대한 늦게 진행해 포도가 익을 시간은 충분히 제공한다. 이후 경험 많은 직원들이 여러 번에 걸쳐 수작업으로 포도를 수확하고, 저장고에서 추가로 선별작업이 진행된다. 개별 포도알의 성숙도에 따른 철저한 분리 과정을 거쳐 최고 품질의 와인 생산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모든 과정은 마르쿠스 몰리터의 주도하에 진행된다.
포도 재배의 북방 한계선에 속하는 독일은 포도의 숙성 정도가 중요하다. 완숙될수록 당분 함량이 높고 아로마와 풍미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독일에선 와인의 스타일에 따라 완숙 정도가 다른 포도를 사용하는데, 수확 시 포도 과즙의 당도에 따라 등급을 분류한다. 독일의 와인 등급 체계상 최상위 등급인 '프래디카츠바인(Pradikatwein)'은 포도의 숙성 정도에 따라 6개의 세부 등급으로 나뉜다.
가장 기본등급인 '카비넷(Kabinett)'은 수확기가 시작된 후 일주일 이내에 수확한 어리고 새콤하며 싱싱한 녹색 포도알을 사용한다. 맛이 가볍고 신선하며 산도가 높다. 당도는 낮은 편으로 레몬·라임·사과 등의 과일 향이 뚜렷하다. 다음 등급인 '슈페트레제(Spatlese)'는 '늦수확'이란 의미로 일반적인 수확 시기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수확해 숙성도가 높아진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카비넷에 비해 농축된 향과 풍미, 알코올 도수와 무게감이 약간 높은 편이다. 이보다 한 등급 높은 '아우스레제(Auslese)'는 잘 익은 송이만 골라서 수확하기 때문에 당도가 더 높고 향도 더 풍성하다.
'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BA)'는 아우스레제보다 상위 등급으로 아주 잘 익은 포도알만 손으로 수확해 만드는 스위트 와인인데 그만큼 귀하고 생산량도 적다. BA 등급과 같은 당도를 지닌 '아이스바인(Eiswein)'은 한겨울 한파로 얼은 포도를 수확해 만든다. 최상위 등급인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TBA)'는 나무에서 건포도처럼 마른 귀부 포도만 선별해 만든 스위트 와인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이트 와인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의 와인 체계는 와인 업계에서도 복잡하기로 유명하다. 업계에서조차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복잡하다 보니 마르쿠스 몰리터에선 소비자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2007년부터 와인의 당도에 따라 캡슐의 색상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화이트는 드라이, 그린은 오프-드라이, 골드는 스위트 와인이다. 화이트 캡슐과 그린 캡슐은 카비넷부터 아우스레제까지 만들며, 골드 캡슐은 카비넷부터 TBA까지 모든 등급을 만든다.
화이트 캡슐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알코올 도수가 높고 더욱 완숙한 과일 풍미가 드러난다. 깔끔한 여운을 위해 귀부균의 영향을 받은 포도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린 캡슐은 적당한 단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루는 와인으로 음식과 함께 즐기기에 가장 알맞다. 특히 스파이시하고 짭짤한 아시안 음식이나 바비큐처럼 훈연향이 나거나 직화로 요리한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린다.
골드 캡슐은 바로 마셔도 좋지만 10년 이상 숙성한 후 즐기면 고혹적인 풍미가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아우스레제 이상의 골드 캡슐은 30년 이상 숙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단맛이 거의 없는 화이트 캡슐은 3000ℓ 크기의 중성적인 오크통을 사용해 양조하는 반면 단맛이 있는 그린 캡슐과 골드 캡슐은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양조한다.
마르쿠스 몰리터는 매년 100종이 넘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만큼 모든 제품이 국내에 수입되고 있진 않다. 현재 국내에는 십 여종이 수입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젤팅어 존넨누어 리슬링 아우스레제(Zeltinger Sonnenuhr Riesling Auslese)'가 주목할 만하다. 모젤 지역 최고 등급 포도밭 중 하나인 젤팅어 존넨누어 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드라이 와인으로 투명하고 깨끗한 색상과 어울리는 깔끔하면서도 신선한 입맛이 특징이다. 토양의 질감이 명확히 느껴지며 매우 우아한 복숭아 향이 매력적이다.
이보다 조금 더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는 '킨헤임 후베투스라이 리슬링 아우스레제(Kinheim Hubertuslay Riesling Auslese)'가 있다. 위르지거 뷔르츠가르텐 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드라이 와인으로 강렬한 과실 향과 휘발유 향이 혼재돼 있다. 입안에선 약간의 산화된 풍미와 함께 잘 정돈된 산도 그리고 완벽한 질감이 다양한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마르쿠스 몰리터는 캡슐의 색상 외에도 라벨에 별(*) 모양을 하나부터 세 개까지 사용해 해당 빈티지의 품질을 알 수 있게 했다. 별의 수가 많을수록 포도알 선별을 통해 더 좋은 포도를 골랐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러모로 소비자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마르쿠스 몰리터의 와인은 저명한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운영하는 와인 평론 매체 '와인 애드버킷(Wine Advocate)'에서 2013년 처음으로 2011년 빈티지 '벨레너 존넨누어 리슬링 아우스레제(Wehlener Sonnenuhr Riesling Auslese)'가 100점을 받았다. 이후 2015년에는 2013년 빈티지 3개 와인이 동시에 100점을 받아 와인 업계를 놀라게 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100점을 획득해 현재는 독일 와이너리 중 가장 많은 100점 와인을 보유한 와이너리로 유명하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 달에 150만원 줄게"…딸뻘 편의점 알바에 치근덕댄 중년남 - 아시아경제
- 버거킹이 광고했던 34일…와퍼는 실제 어떻게 변했나 - 아시아경제
- "돈 많아도 한남동 안살아"…연예인만 100명 산다는 김구라 신혼집 어디? - 아시아경제
- "일부러 저러는 건가"…짧은 치마 입고 택시 타더니 벌러덩 - 아시아경제
- 장난감 사진에 알몸 비쳐…최현욱, SNS 올렸다가 '화들짝' - 아시아경제
- "10년간 손 안 씻어", "세균 존재 안해"…美 국방 내정자 과거 발언 - 아시아경제
- "무료나눔 옷장 가져간다던 커플, 다 부수고 주차장에 버리고 가" - 아시아경제
- "핸들 작고 승차감 별로"…지드래곤 탄 트럭에 안정환 부인 솔직리뷰 - 아시아경제
- 진정시키려고 뺨을 때려?…8살 태권소녀 때린 아버지 '뭇매' - 아시아경제
- '초가공식품' 패푸·탄산음료…애한테 이만큼 위험하다니 - 아시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