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

2024. 9. 6.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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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

딥페이크 범죄, 몰랐더라도
엄연히 존재한 사건… 직접
경험 못한 현실도 직시해야

딥페이크 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평범한 사진을 합성해 음란물로 만들고 유포하는 행위가 빈번해지자 공포에 질린 학생들이 자신의 SNS 계정을 삭제하고 프로필 사진을 내린다고 한다. 이 범죄가 주로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발생하며 지인을 대상으로 저지른다니 더욱더 충격적이다.

쏟아지는 보도를 접하고 놀라기는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음란물 이미지를 실제로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런 딥페이크 이미지가 얼마나 진짜처럼 보이는지도 모를 뿐더러, ‘진짜 자기’가 아니라면 무시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순진한 생각도 해본다. 이처럼 당사자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정도가 어떤지 쉽게 상상하지 못하지만, 피해는 매우 현실적이고 심각해 보인다.

딥페이크 기술의 위험성은 단순히 음란물을 생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기술이 제기하는 가장 큰 도전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보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파급력을 지닌다.

이런 상황은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로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한계가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하며 명확함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명료하게 진위와 시비를 가리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원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기 어려워진다.

최근 한 OTT 플랫폼에서 방영된 드라마 제목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이와 관련된 철학적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제목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났을까? 안 났을까?”라는 인식론과 존재론에 관한 오래된 질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듣는 주체가 없다면 소리가 나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경험주의적 관점을 강조한다. 나무가 쓰러질 때 발생한 공기 진동이 인간의 귀를 통해 지각되지 않는다면 나무가 쓰러지면서 났을지 모르는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쓰러졌다는 객관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우리는 나중에라도 그 나무를 보고 숲속에서 울려 퍼진 소리를 상상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숲 생태계의 파괴나 토양 침식 같은 영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뒤늦게 현실화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지각하지 못한다고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일들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세상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숲’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그런 숲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하며, 숲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종종 의미 없이 지나치거나 외면한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의 문제들로부터 떨어져 비교적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중요한 문제들을 간과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는 단순히 진위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으며, 진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 영향 또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보다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경험하거나 지각하지 못하지만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는 숲들이 존재하며,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얽히고설킨 연쇄를 거쳐 우리의 현실과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딥페이크 기술이 가져온 사회적 문제는 그런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매혹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복잡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숲은 더욱더 가늠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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