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불가촉 귀족

2024. 9. 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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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예로부터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 불리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불가촉 귀족'은 도처에 흔하다.

그러다 답답해하거나 입을 대는 이가 없어지면 그 지도부는 불가촉 귀족이 된다.

굳이 인기를 얻으려 하지 않고 그냥 제 갈 길을 처연히 가는 지도자가 바로 건드리고 싶지 않은 강자, 불가촉 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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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


인도에는 예로부터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 불리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제도로는 이런 차별을 극복하려 애쓰지만 여전히 그 사회의 극복과제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불가촉 귀족’은 도처에 흔하다. 이들은 남이 접촉하길 꺼린다는 점에서 다른 계급과의 신체 접촉을 금지당한 불가촉천민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다르고, 무엇보다 권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크고 작은 조직과 단위를 막론하고 불가촉 귀족이 생겨날 수 있다. 지도부가 이상한 결정을 내리고 구성원의 정당한 지적에도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강행하는 것이 시작이다. 처음에는 몇몇 구성원이 이해가 안 된다며 물음을 제기한다. 그런데 기대하는 반응이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다시 비슷한 일이 이어진다. 구성원들은 이제 답답해서 비판을 퍼붓고 저항하지만 그 저항도 성과 없이 끝나고 더 이상한 결정이 내려진다.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은 조직을 떠나거나 침묵하기로 한다. 그러다 답답해하거나 입을 대는 이가 없어지면 그 지도부는 불가촉 귀족이 된다.

구성원을 억압해 공포에 떨게 하는 독재자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그냥 대다수가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권력을 꾸준히 행사하고 비판에는 침묵해 반대 목소리를 시들하게 만들 뿐이다. 엄청난 악행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처절한 저항이 일어나지도 않고, 무반응에 실망한 여론은 결국 잠잠해진다. 굳이 인기를 얻으려 하지 않고 그냥 제 갈 길을 처연히 가는 지도자가 바로 건드리고 싶지 않은 강자, 불가촉 귀족이다.

우리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지난 2년4개월 동안 국회에서 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못한 장관 후보자 임명 27회, 법안 거부권 행사 21회를 기록했는데 전임자들과 비교하면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이전 30년 동안 여러 정권에서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된 경우는 단 7회였다. 물론 야당의 책임도 크지만 “왜 저렇게까지 하지?”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인사들의 발탁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꽤나 민망한 일에도 별 부담을 안 느끼는 태연함, 그리고 설명이 힘든 막연한 고집에 요즘은 여당마저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일이 반복되니 이제는 그 당혹감도 비판도 관심도 줄고 있다.

기독교회도 불가촉 귀족이 돼가는 듯하다. 한때는 한국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으나 사회적 지탄을 받은 각종 죄의 결과로 교세가 악화일로다. 그런데도 세상이 주는 핍박을 견딘다는 식으로 자성과 회개 없이 꿋꿋하게 버티는 중이다. 결국 사회는 교회에 대한 기대를 접었고, 기대가 없으니 비난도 잦아들었다. 교회 안에서 실망한 교인들은 말없이 제도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의 길에 오른다.

이처럼 불가촉 귀족의 심각한 해악은 그가 속한 조직에 퍼지는 냉소와 무기력이다. 냉소와 무기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불가촉 귀족의 이상한 행동을 더 자유롭게 만들고, 이는 다시 냉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생긴다. 불통의 권력이 거침없이 작동하는 동안 공동체는 공동의 목표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상실하고 각자도생을 위해 표류한다.

이 악순환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인도가 불가촉천민의 문제를 깔끔히 처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가촉 귀족도 일단 생기면 없애기 힘들다. 그나마 해결의 작은 실마리는 결국 접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용기와 힘을 내서 만져야 한다. 그들을 차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대신 친구로든 비판자로든 마주해야 한다. 그들이 나의 접촉을 두려워하거나 뻔뻔하게 거부하더라도 손을 대보자. 당연히 좀 소란해지겠으나 시끄러운 다툼이나 원치 않는 어색함이 냉소와 무기력의 침묵보다는 낫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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