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일제 강점기 한국인은 누구인가? <Ⅰ>

2024. 9. 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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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일제 강점기를 둘러싼 오늘의 역사 논란은 잘못된 역사교육과 잘못된 진영대결의 잘못된 복합 산물이다. 논란의 핵심은 한마디로 일제 강점기 한국인은 과연 누구였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또한 그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직결된다. 논란의 한 초점은 당시 한국인들의 국적이다. 국적은 곧 시민권을 말한다. 따라서 국적은 결코 형식논리가 아니다. 로마와 유대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이 영국과 인도, 영국과 식민지 미국, 프랑스와 알제리, 일제하 만주, 독일과 프랑스, 나치와 유대인을 보라. 즉, 시민권의 위계와 종류는 너무도 다양했다. 국적은 한장의 서류나 여권 직인이 결코 아니다.

「 국적, 동일한 시민·국민 자격 의미
일제하 한국인에겐 국적법 미적용
권리·의무에서 완전 차별과 억압
‘주권 없는 국민’에 대한 이해 절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선조 국적은 일본'이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야당 의원과 설전을 벌였다. 연합뉴스

국적 혹은 시민권의 차별과 억압이 존재할 때, “당신 누구냐?”는 개인적·집단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종종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적은 곧 특정 국가의 시민권, 즉 동일한 시민·국민이 될 자격과 소속을 말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국가 없는 국민, 사실상의 무국적 시민이 많았던 이유다.

따라서 공통의 국적 혹은 시민권은 본질상 위계와 차별의 철폐가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다. 안전과 보호, 권리와 의무, 자유와 평등을 필수 요건으로 삼는 근대 시민권이 신민·거민(居民)·유민(留民·流民)·족민(族民)·영주민·주민이 아닌 시민·국민(됨)의 자격과 요건인 까닭이다.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다. 만약 한국인이든 누구든 일본 국가의 국적과 시민권을 가졌다면 당연히 같은 시민이나 국민 자격을 부여받아야 한다.

당시 한국인들은 국적의 동일성에 근거하여 일본인, 일본 국민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누렸는가? 무엇보다 강제 병합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적법은 당시 한국에서 실시되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일본 국적(법)을 적용할 경우, 한국인의 국적 이탈(제20조)을 통한 반일 저항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효율적인 한국인 억압과 통제를 위해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일본은 병합 이후에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법적 신분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지난달 13일 손희하 전남대 명예교수가 공개한 일제강점기 시절 사용된 조선어 사용 금지 카드. 표면에 일어로 ‘말은 일본어로’라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반복적인 사상 교육과 통제로 조선인을 제국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뉴스1


한국인은 제국의 신민이었지만, 일본인과 동일하게 일본 헌법 및 국적법의 적용을 받는 국민은 전혀 아니었다. 당시 일본 국적 사항과 국적법(법률 제66호)은 일본 헌법의 위임법률(대일본제국헌법 제18조)이었다. 언필칭 입헌국가·법치국가였음에도 일본은 한국인에 관한 한 헌법과 법률을 적용하는 대신 관습과 조리에 근거한 국적 취득으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호적도 구별되었다. 일본인(내지인)은 내지 호적에 등재된 반면, 합병 이후 조선호적령(총독부령 제154호)에 따라 조선인은 조선 호적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조선인은 내지(일본) 호적으로 전적(轉籍)할 수 없었고, 일본인도 조선 호적으로 전적할 수 없었다. 혼인과 입양 등을 통한 전적만 가능하였다. ‘국적’법은 적용하지 않고 ‘호적’령은 따로 만들 만큼 두 시민권이 엄격히 구분되었던 것이다.

권리와 의무는 국적과 더욱 거리가 멀었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거주자는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헌법과 국적법의 적용을 받는 국민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기본권 박탈이었다. 한국은 식민지와 강점지에 적용되는 참정권의 두 유형, 즉 ‘식민본국 대표 구성을 위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 부여’나 ‘식민·강점 지역 자체 대표 구성을 위한 참여권 부여’에 모두 해당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참정과 자치를 향한 청원은 거부되었다. 당시 열혈 친일세력들이 완전 동화(同化)를 위해 일본국민 대우를 해달라고 청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허용하지 않았다.

2023년 12월 일제강제 징용 피해자 고(故) 최병연 씨의 유해봉환 추도식이 열리는 전남 영광군 영광예술의전당 앞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일본의 사죄·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한국인은 병역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역시 국민에 대한 기본 의무의 강제 면탈이었다. 아예 징병검사 대상자를 일본 호적법 적용자로 한정하여 조선 호적 소속자는 제외하였다(일본 병역법 23조). 한국인들의 징병제 실시 청원조차 거부하였다. 군사지식과 무기를 갖춘 한국인들의 저항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국 전체주의 체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국적법 적용도 받지 않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이때는 병역법 개정, 육군특별지원병령,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의 제정을 통해서였다. 헌법에 근거한 기본적인 국적법은 적용하지 않으면서 전체주의 전쟁 수행을 위한 특별 입법조치들은 적용됐다.

당시 한국인들은 국권은 망실되고 일본의 헌법과 국적법도 적용되지 않는, 권리도 의무도 없는 이른바 ‘비국민적 국민’이었다. 이론적으로 한국인은 ‘국권 없는 국민’이자 ‘주권 없는 국민’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일본 강점과 한일관계의 이런 특수성이 아니다. 일본의 한국 강점과 “한국인은 일본 국적·국민이었다”는 주장이야말로 ‘상식’과 ‘국제법’과 ‘국제규범’의 완전 위반이다. 상식과 국제법에 비추어 일본의 한국 강점은 원천 무효다. 시효의 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점이 훨씬 더 중요한 본질을 구성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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