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하의 시시각각] 문재인 수사, 보복이 아니라 업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 석상에서 문 전 대통령이 보여준 선량한 미소와 어눌한 말투는 지지율 관리에 큰 보탬이 됐다. 그는 적폐청산을 내걸고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를 일으켰지만, 이미지 포장은 기가 막혔다.
그런데 그런 문 전 대통령도 재임 시절 공개적으로 격노한 적이 있다. 바로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향해서였다. 2017년 가을부터 검찰은 국정원 특수활동비, 군 댓글 공작, 다스 의혹 등 여러 갈래로 MB의 목덜미를 조이기 시작했다. 이에 MB는 2018년 1월 17일 직접 발표한 성명서에서 “검찰 수사에 대해 많은 국민이 보수 궤멸을 겨냥한 정치공작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보고 있다”고 치받았다. 그러자 문 전 대통령은 다음 날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거론하며 정치보복 운운한 데 대해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대통령을 역임한 분으로서 말해서는 안 될 사법질서에 대한 부정이자 정치 금도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발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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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ㆍMB 구속 후폭풍 못 헤아려
보수, 증오ㆍ한으로 뭉쳐 정권 교체
박 옥죈 ‘경제공동체’ 이젠 문 겨냥
」
점잖던 문 전 대통령이 왜 이리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냈을까. 아마 MB 발언이 감추고 싶은 속내를 찔렀기 때문이리라. 문 전 대통령은 2011년 펴낸 저서 『운명』에서 “나는 지금도 그분(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를 내 수첩에 갖고 다닌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이 터진 MB 정부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불문가지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는 문 전 대통령 취임 전부터 진행된 일이었지만 MB 수사는 전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의지였다. 당시 정치권엔 “문 대통령은 오히려 박 전 대통령에겐 별로 나쁜 감정이 없지만, MB는 반드시 손볼 것”이란 말이 나돌았고, 결국 소문은 현실화됐다.
권력에 도취한 탓이었을까. 문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을 두 명이나 구속하면 어떤 후폭풍이 올지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그때는 보수가 씨가 말라 진보 진영이 수십 년간 집권할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은 불과 5년 만에 무너졌다. 문재인 정부 적폐청산 수사에서 900명 이상이 조사를 받았고, 200명 이상이 구속됐으며, 5명이 목숨을 끊었다. 보수를 증오와 한으로 똘똘 뭉쳐 재기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문 전 대통령이다.
문 전 대통령이 일으킨 피바람은 이제 본인까지 집어삼킬 기세다. 최근 검찰이 문 전 대통령 딸 다혜씨 집을 압수수색했는데 압수영장에 문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혐의 피의자로 적시됐다. 이상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8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에 발탁됐는데, 그 후 문 전 대통령의 옛 사위 서모씨가 이 전 의원이 실소유한 항공사 타이이스타젯에 전무로 취직했다. 서씨는 항공사 경력이 전혀 없는 인사였다. 검찰은 이 전 의원이 중진공 이사장에 간 대가로 서씨를 취직시켜준 것이어서 취직을 뇌물로 보고 있다.
민주당은 문 전 대통령과 다혜씨 부부는 독립적 생계이기 때문에 사위의 취업을 문 전 대통령의 뇌물로 엮는 건 무리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최순실씨와 ‘경제 공동체’로 엮여서 뇌물죄로 처벌을 받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검사 면전에서 “왜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서 더러운 사람으로 만드냐”며 서류를 바닥으로 밀쳤을 정도로 ‘경제 공동체’ 논리에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법원은 결국 검찰 손을 들어줬다. 하물며 문 전 대통령과 다혜씨는 부녀관계다. ‘박근혜-최순실’보다 훨씬 더 가깝다.
박 전 대통령을 옭아맸던 ‘경제 공동체’가 지금 문 전 대통령을 겨냥하는 건 씁쓸한 아이러니다. 문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심정을 조금 이해하게 됐을까. 민주당은 이번 수사를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나, 굳이 따지면 인위적인 보복이라기보다 자연적인 업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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