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란의 쇼미더컬처] ‘간송의 방’에서 만난 것

강혜란 2024. 9. 6. 00: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위인전에서 볼 법한 인물이 나처럼 살아 숨 쉬던 인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지난 9월 3일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의 ‘간송의 방’을 미리 찾았을 때 그랬다. 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되는 것을 우려한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유산이다. 1938년 간송이 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을 설립한 이래 처음으로 개설된 대구 분관에 그의 생을 집약한 ‘간송의 방’이 마련됐다. 사재를 털어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등 무가지보(無價之寶)의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이 휘문고 재학 시절엔 야구선수로 활약했음을 일러 주는 자료가 미소를 자아낸다. 이 밖에 그의 글씨와 그림, 사진, 인장(印章) 등 유품 26건 60점이 수장가, 교육자, 연구자, 예술가로 살아간 56년 생애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강점기에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의 해외 반출을 막았던 간송 전형필.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그 가운데 눈길을 끈 게 빛바랜 국보 지정 통지서다. 해방 이후 개인 소장 고미술품이 훼손되거나 해외로 유출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 지정이 진행됐는데, 1958년 간송 소장품 가운데 일차적으로 훈민정음 등 9점이 포함됐다. 서울시 교육위원회 교육감 명의의 통지서는 세로줄 편지지에 볼펜 글씨로 무뚝뚝하게 지정 사실을 알릴 뿐, 이로 인해 어떤 혜택이 있을 거란 언급은 없다. 이걸 받아든 간송이 국가의 인정에 뿌듯해했을지, 사유물에 날아든 관(官)의 개입에 움찔했을지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골동품 구입 노트와 영수증, 해외전시위원회 위촉장 등이 궁핍한 저개발국가에서 가치 있는 문화를 보존하려고 고군분투한 선각자의 삶을 드러낸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소장품 가운데 훈민정음 해례본 등 9점을 국보로 지정한다는 내용의 국보지정통지서(1958년).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미술관 측에 따르면 이 서류들은 경주에 거주하는 고서수집가 제동식(80)씨의 기증품이다. 사업가였던 제씨는 1975년 골동품 수집가인 지인으로부터 고서적을 다수 넘겨받았는데, 이 가운데 간송 관련 서류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제씨가 2020년 가을 간송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에게 기증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전 관장은 “학창시절 상장까지 포함된 이들 서류 뭉치가 어떻게 골동품 시장으로 흘러나간 건지 몰라도 이렇게 되돌아와 기쁘고 감사하다”고 했다.

사실 간송은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았기에 그의 컬렉션이 제대로 조명된 것은 그의 사후다. 1966년 최완수 연구실장(훗날 소장 역임)을 중심으로 한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이른바 ‘간송학파’가 부상했고, 이것이 대중적 전기 『간송 전형필』(이충렬 지음) 등으로 이어지며 신드롬을 낳았다고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은 돌아본다. 이 같은 ‘간송 신화’의 확장 과정을 통해서도 어떤 문화현상이 트렌드를 넘어 지속되기 위해선 그것을 지지하고 보태주는 후대의 노력이 필수란 걸 알 수 있다. 기증에 힘입어 두터워진 ‘간송의 방’은 컬렉션을 넘어 컬렉터의 삶 또한 끊임없는 재구성과 반추의 대상이며, 후세의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자산임을 일러준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