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시(詩)이자 음악… 보이지 않는 감각을 그리는 손길 [더 하이엔드]
■ 2024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④ 한진 작가
「 지난 2022년부터 9월은 ‘예술의 달’이 되었습니다. 국내 대표 아트 페어 키아프와 세계적으로 가장 ‘힙’하다는 아트 페어 프리즈가 함께 열리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막이 열리는 4일부터 서울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관심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겠죠. 한국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도 증폭됩니다.
더 하이엔드가 올해도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들 중 주목할만한 이들을 선정, 묵묵히 예술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 아티스트들을 다시 한번 조명합니다.
」
한진 작가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표기할 수 있지만 발음되지 않는 묵음(默音)처럼, 한순간 사라지는 대상이나 감각들을 시각화해 캔버스에 옮긴다. 작가는 흩어진 감각들이 소멸하지 않고 다른 움직임으로 간다고 믿는다.
점점 느리고 폭 넓게…세상의 속도에서 비켜난 공감각적 관찰
한진 작가의 작업은 보이지 않거나 없어지는 감각들을 다룬다. 빛이나 음악 때로는 청각적 질감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현장을 찾아 오랜 시간 몸으로 느끼고 감각을 새긴다. 오랜 시간 관찰과 연구를 통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작업 특성상 작가는 리서치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지난 개인전에서는 840번이나 반복하여 연주하는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 ‘벡사시옹’을 대상으로 본질에 가까운 리듬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런 과정이 지난하진 않을까. 그는 악보에서 연주를 지시하는 용어인 ‘라르간도(Largando, 점점 느리고 폭 넓게)’를 예로 들며, 빠름이 익숙한 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보폭을 찾는 감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Q : 최근작은 덩굴처럼 복잡한 선들이 얽힌 모습이다.
“빛이 지형(地形)을 만드는 모습을 관찰하게 됐다. 태양은 지고 뜨기를 반복하는데 여명 혹은 석양이 된 상태가 이중적으로 느껴졌다. 빛이 형성한 이미지를 관찰한 ‘밤은 아직 기다려야 하고 낮은 이미 아니다’ 연작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Reverb within Echo’는 물리적·감정적으로 커다란 흐름을 지나고 났을 때 찾아오는 미세한 떨림과 울림을 표현했다.”
Q : 보이지 않는 감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어떤 장소나 대상에서 느끼는 감정과 감각은 시각 하나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다. 청각적 기억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느끼는 질감이 있듯이 청각적으로 느끼는 질감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몸의 감각을 더 명료히 관찰하고 시각화하기 위해 떠오른 장소나 대상을 찾아간다. 기억과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몸으로 느끼고 새기는 시간이 중요하다.”
Q : 오랜 시간 리서치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음악은 물론 현장답사를 통해 연구하는데, 주로 어떤 장소를 방문하는가.
“지질학적으로 일시적 변화가 아닌, 오랜 시간을 관통하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던 장소를 찾는다. 이 장소를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 준다. 현재 시간뿐 아니라 과거에 쌓인 시간도 함께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문학과 음악 등 그동안 경험했던 다른 분야의 감정을 경유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기고 작업의 확장이 발생하기도 한다.”
Q : 작업의 원동력은.
“작품의 특성상 대상을 오래 관찰하고, 현장답사와 자료를 토대로 사유하는 시간이 작업 과정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빠름이 익숙한 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보폭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삶의 과정이 모여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된다.”
Q : 이번 키아프 서울 하이라이트 작가로 선정됐다.
“그림을 그리는 움직임과 속도는 메트로놈과 같은 기계로 계측할 수 있는 박자는 아니다. 무언가를 시각화는 움직임 안에는 도약과 일탈 그리고 수락의 순간이 교차한다. 그림 안에 쌓인 그 순간을 함께 사유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Q : 요즘 관심 있는 것은.
“최근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의 공통점은 ‘이윽고’ ‘마침내’ ‘가까스로’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런 감각을 여러 각도로 살피며 시각화하고 있다.”
Q : 예술가로서 어떤 목표가 있는지.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장하(長夏)’의 계절이 있는데 여름에 맺힌 열매가 속으로 익어가는 때라고 한다. 이 시기를 거치지 않으면 풋과일이 되기 때문에 얼마간의 정지된 듯한 시간을 견디며 기다려야 한다. 순간순간 삶 속에 다가오는 장하의 계절을 감사하며 즐기고 싶다. 이 계절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을 충분히, 섬세히,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느끼기를 멈추지 않는 동적인 힘이 필요하다. 그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만의 속도와 보폭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단기적이자 장기적 목표다.”
■ 작가 한진은…
「 1979년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와 전문사를 졸업했다. 서울 원앤제이갤러리(2021), 서울 갤러리 조선(2018), 서울 아트스페이스풀(2016),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15)를 비롯해 7회의 개인전,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경기문화재단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이소진 기자 (lee.soj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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