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가 몰고 온 피바람... '폭군' 광종의 최후
[이준목 기자]
'고려의 이방원' 광종(光宗) 왕소(王昭, 925-975)는 고려의 4대 국왕이자, 아버지 태조 왕건에 이어 실질적으로 왕조의 기틀을 완성한 '제2의 창업 군주'로 꼽힌다. 광종은 고려 초기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등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주도하며 아직 불안정하던 나라의 기반을 안정시킨 명군이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지나친 숙청과 공포정치를 벌여 수많은 이들을 학살한 폭군이라는 명암이 엇갈리는 인물이다.
지난 4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개혁군주 광종은 왜 폭군으로 돌변했나'편을 통해 광종의 일대기로 본 지도자의 빛과 그림자를 조명했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스토리 |
광종은 이복형 혜종과 친형 정종에 이어 949년 고려의 네 번째 국왕에 즉위했다. 당시 고려는 태조가 후백제와 신라를 병합해 명목상 삼한을 통일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직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태조는 수많은 호족들에 왕씨 성을 내려주거나, 혼인을 통해 자기 사돈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전국의 유력한 호족들을 포섭했다. 이로 인하여 왕건은 부인만 29명에, 아들은 25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호족 유화책은 삼국 통일과 태조의 사후에는 오히려 후계 구도를 놓고 호족 간의 극심한 세력 다툼으로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광종의 선왕인 혜종과 정종은 모두 재위 내내 왕규, 왕식렴 같은 강성한 호족과 외척 세력들에 휘둘리다가 왕권을 제대로 세우기도 전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광종의 재위 1기는 발톱을 숨긴 절치부심의 시기였다. 광종은 정권 안정을 위해 즉위 초기에는 호족들과 타협하며 포상을 내리고 회유하면서 몸을 낮췄다. 한편으로는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황제를 자칭하고 군주의 위엄을 세우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광종은 당태종의 정치술과 제왕학을 담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틈만 나면 숙독하며 덕치의 길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유학자 최승로는 "광종의 처음 8년간의 다스림은 삼대(三代)에 견줄만하다"고 평가하며 중국사에서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꼽히는 하·은·주 시대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고 광종의 모범적인 초기 치세를 극찬했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스토리 |
고려 초에는 양인들이 후삼국 통일전쟁 중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져서 호족의 노비가 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노비가 호족의 개인 재산에 불과했다면, 양인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주요 생산계층이었다. 광종 입장에서는 노비안검법을 통하여 호족의 재정적 기반과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재정까지 더 풍족해지게 만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조치였다.
당연히 호족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고려 건국 이래 호족의 재산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고 한 군주는 광종이 최초였다. 학계에서는 광종이 이미 오래전부터 노비안검법을 구상했으며 즉위 초기의 유화책은 호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해석한다. 광종은 호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비안검법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른바 '왕권강화의 시기'로 불리는 광종 2기의 서막이었다.
광종은 2년 뒤인 958년에는 과거(科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인재를 시험으로 선발하게 했다. 또한 공복 제정을 통하여 관리를 4등급으로 나누고 품계에 따라 관복의 색상을 다르게 정하여 조정의 질서를 확립했다.
특히 광종이 도입한 과거제는 고려를 넘어서 후대인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기까지 무려 936년간이나 존속하며 인재 등용 시스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호족들은 이제 혈통 중심으로 세습되어 오던 기득권을 실력으로 증명해야 하는 세상을 맞이했다.
과거제도 시행을 주도한 것은 쌍기(雙冀)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 후주의 인물로 사신단으로 왔다가 광종의 총애를 받아 한국에 귀화한 중국인이었다. 광종은 쌍기의 총명함을 높이 사서 측근으로 중용했고, 그에게 과거제를 비롯한 고려의 주요 개혁정책을 주도할 브레인 역할을 맡겼다.
광종은 쌍기 외에도 많은 귀화인 출신들을 기용하고 우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광종이 고려의 기득권 호족 세력과 연관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친위세력을 키우려고 했던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는 광종이 "쌍기를 등용한 뒤로 문사들을 높이고 등용하며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셨다"고 평가하며 노골적인 귀화인 우대정책에 대해 고려인 신하들의 불만이 컸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광종의 이러한 왕권 강화 행보는 여러모로 후대인 조선왕조의 3대 국왕인 태종 이방원과 매우 유사하다. 태종 역시 혼란했던 건국 초기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자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다. 정적들에 대한 가차 없는 숙청과 냉혹한 면모 역시 광종과 태종이 일치하는 부분이다.
광종 치세 말기인 3기는 이른바 '호족청산과 공포정치의 시대'로 요약된다. 광종 11년인 960년, 하급관리인 권신에게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참소를 듣자 광종은 이들을 삭탈관직하고 내쫓았다. 광종은 일방적인 고발만 듣고 뚜렷한 증거 없이 신하들을 처벌했다. <고려사>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기 어렵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광종은 이전과는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스토리 |
문제는 이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 대상을 가리지 않고 근거 없는 고발과 모함이 횡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태조의 개국공신이자 평주의 대호족이던 박수경 역시 아들들이 역모 혐의로 수감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병을 얻어 사망하기에 이른다.
<고려사>에는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얻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였다, 종이 주인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니 감옥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감옥을 두었다"는 등 그 폐해를 기술했다.
광종의 폭정은 단순히 호족 숙청만이 아니라 오래된 공신과 장수들, 왕족들에게까지 피바람을 몰고 왔다. 태조 시대에 최대 3200여 명에 이르렀던 공신은, 불과 20년도 안 되어 불과 40여 명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물론 자연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광종의 숙청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광종은 선왕의 아들들이자 자신에게는 조카가 되는 흥화궁군(혜종의 아들), 경춘원군(정종의 아들)마저도 거짓 역모 혐의에 연루시켜 처형했다. 광종 입장에서는 호족들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위 계승 명분이 있는 조카들의 존재가 언제든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급기야 광기에 싸인 광종은 자신의 친아들인 태자 왕주(훗날의 경종)마저 외가에 결탁해 반역을 모의했다고 의심했으나 아내 대목왕후의 강력한 만류로 처벌은 면했다. 한때 광종이 꿈꾸던 개혁 정치는 어느새 자기 혈육도 믿지 못할 만큼 의심과 공포, 살육만 난무하는 독재정치로 변질되어 있었다.
말년에 이르러 광종은 언제부터인가 거듭된 숙청에도 스트레스와 환멸을 느꼈는지,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사찰을 건립하고 기도를 하는데 많은 시간과 재정을 낭비했다. 오죽하면 광종이 불교를 후원하는데 1년간 들인 비용이 아버지 태조의 10년 치 비용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불교를 너무 깊이 믿으시고, 복과 장수를 구하며 기도만 일삼으시니, 한정된 재력을 다 쓰면서 무한한 인연을 만들려 하셨다"며 말년에 변질된 광종의 행보를 비판했다.
975년, 광종은 재위 26년 만에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결과적으로 광종의 공포정치가 낳은 업보는 결국 그의 사후, 후대까지도 악영향이 이어지게 된다.
광종 때 억울한 참소로 희생된 이들이 하도 많다 보니, 후대인 경종 시기에는 원한에 대한 사적제재를 허용하는 희대의 악법인'복수법'이 탄생한다. 이로 인하여 한때 호족과 왕족들까지도 서로 죽고 죽이는 난장판이 벌어진 끝에 얼마 가지 않아 폐지된다.
아들 경종이 방황을 거듭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어린 시절 아버지 광종으로부터 받은 각종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이를 두고 광종과 비슷한 행보와 업적을 남긴 후대의 조선 태종 역시 비록 숙청에는 잔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후계자인 세종의 태평성대에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 가장 비교되는 부분이다.
훗날 성종대에 최승로는 광종의 업적을 논하며 "광종께서 항상 공손하고 겸손해 처음과같이 정사를 부지런하게 하셨다면 어찌 향년 50세에 그쳤겠습니까.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합니다"라고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광종의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본래의 개혁 의지에서 변질되어 결국 스스로의 수명까지 재촉했다는 신랄한 평가였다.
광종은 분명히 개혁정책과 왕권 강화로 호족들을 제압하며 고려 발전의 초석을 놓은 군주였다. 다만 최승로의 평가처럼 후대로 갈수록 무리한 독선과 숙청으로 폭군의 면모를 드러낸 거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광종을 두고 그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했던 인물인 동시에, 그 시대의 한계 또한 드러내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그 시작만큼이나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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