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왜 사랑하냐 묻는다면, 이래서입니다
이제는 괜찮아, 싶을 때쯤 삶은 또 힘들어지곤 합니다. 그게 삶이니까요. 소중한 존재들과의 이별,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가족 간의 갈등, 잘 나아지지 않는 반려병 등. 어려움과 동행하면서 매번 다시 일어서는 마음에 대해 씁니다. <기자말>
[김나라 기자]
아침 일찍 출근한 나는 가방을 빠르게 뒤적였다. 어, 왜 없지. 자전거를 타고 오는 동안 바구니에 실어둔 큰 텀블러의 뚜껑이 사라져 있었다. 서둘러 나오느라 단단히 잠가두지 못한 게 문제였다.
40년차 ADHD 사람으로서 웬만한 물건은 잃어버려도 눈조차 깜짝 않는데, 이때 당황한 건 수년간 같이 산 사람이 남기고 간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혹은 소중했던 사람이 남긴 물건을 버리는 일. 그게 내가 제일 못하는 일 중 하나다. 이별한 뒤 집에 찾아온 친구들과는 실랑이를 했다. 버려!! 안 돼!! 태워!! 못 해!! 내가 버려줄까? 아니!! 지금 버려야 돼!! 진짜 안 돼!! 지금 아니면 너 못 버려!! 괜찮아!!
나도 잘 안다, 찌질한 거. 그래도 가여워서 차마 버릴 수가 없다. 버리면 잊힐 거고, 나마저 잊으면 없던 일이 될 테니까. 아무래도 그건 슬픈 일이니까. 이리하여 내 서랍 속에는 그가 내 생일에 준 생선용 도자 그릇도 뽁뽁이에 싸여있다. 깨져서 반토막 난 채로.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지는 마시길. 그가 노란 고무줄로 머리 묶는 나를 보고 사다 준 머리끈들이 하나둘 사라질 때마다 안타까워질 테니까. 베이킹소다의 마지막 봉지를 비워낼 때, 무거운 생필품 사다 놓는 일을 말없이 맡아주던 그가 떠올라 그 봉지마저 버리기 어렵게 될 테니까.
이렇게 주관적인 의미 부여를 잘하는 게 대학 생활에는 득이었다. 얕은 지식을 가지고도 과제와 시험에서 있어 보이게 써낸다는 소위 '째보'는, 연관성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나오니 말이다. 하지만 이별에서는 '독'이다. 일상에 남은 흔적 하나하나와 이별해야 하는 사람에게 이별은 몇 제곱으로 불어난다.
의미 부여의 독, 그리고 득
서로 잘 모르던 때 그의 집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 거실에 특이하게 생긴 책장이 있었다. 내가 말했다. 오, 책장 너무 좋다. 그가 말했다. 같이 살던 사람이 그를 남겨두고 떠났고, 그 책장은 그 사람이 두고 간 거라고. 두 조각이 퍼즐처럼 맞물려 서로 지탱하게 되어 있는 책장이었다. 어느 정도 겹치게 놓아둘 지에 따라 책장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서 유용해 보였다.
책장은 새로 구한 우리 둘의 집으로 옮겨졌다. 책장이 따로 없었던 나는 책장 크기를 늘려서 그의 책들 옆에 내 책을 세웠다. 빈자리에 여유롭게 기울어져 있던 그의 책들은 점점 늘어가는 내 책에 밀려 꺼내기도 어렵게 끼어 서 있거나 누워서 쌓이거나 했다.
▲ 책장 글을 쓰는 내 옆을 늘 든든히 지켜주고 있는 책장 |
ⓒ 김나라 |
서로의 책을 합친 지 4년 후, 그는 자신의 책을 끈에 묶어 이사를 나갔다. 책장은 완전히 내 책으로 가득 찼다. "한 권 사면 한 권 버려야 해!" 말해주던 그가 없어서, 책장 크기를 최대한 늘리고도 다른 책 위에 누워 쌓이는 책기둥이 여럿 생겼다.
내가 모르는 그의 전 애인에게서 그에게로, 다시 나에게로 와 남겨진 책장. 나는 책장을 보면서 생각한다. 네 운명도 참 재밌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다시는 누구와 함께 살던 집에 혼자 남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러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또 같은 일을 겪지 않아서. 남겨지는 쪽이 내가 되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다행한 일이다.
적어도 책장은 잃어버리거나 부서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고, 그런 내 옆에 책장은 자기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그게 흔들림 없는 응원처럼 느껴지는 것도 습관적 의미 부여이리라.
하지만 읽고 쓰는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해 주던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째보력'은 이따금 이별에 기특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뒷모습과 책장... 사랑의 효용이 뭘까
서로 사랑하던 어느 날에 나는 그와 밖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버스를 기다릴 것이었고 그는 먼저 집으로 갈 것이었다. 정류장에서 문득 돌아봤을 때 그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그 뒷모습이 그대로 사라져 다시는 붙잡을 수 없을 것처럼 아득하고 망연했다. 나는 한참을 달려서 그를 붙들었다. 보고 싶어. 그를 보면서 말했다. 그는 정말로 행복하게 웃었는데,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아렸다.
헤어진 뒤 그가 이 집에서 나갈 때, 나는 이사를 도왔다. 마침내 그가 마지막 짐을 들고 새 집으로 혼자 향할 때, 집 앞 언덕 위에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표정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도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딱 한 번, 사람 없는 길에서 그를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웃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어물 어물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두고 그는 먼저 걸어갔다. 나는 지켜보고 있었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눈에 새길 수 있었던 그날의 마주침이 나는 감사했다. 그때 본 뒷모습은 흔들림 없었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 사랑의 효용(자료사진). |
ⓒ mayurgala on Unsplash |
하지만 정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있을까. 잊혀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꼭 같은 것일까.
그와 모든 연락이 끊긴 날 친구 I가 보내준 말을 나는 거울처럼 자주 들여다본다.
'내가 나를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랑 속에서, 울고 웃고 죽고 살고 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하며 내 몸에 새긴 추억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름이란 것을.'
한 친구는 내 손을 잡고 같이 울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그도 나처럼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래도 그 시간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고. 지나간 것이라 해도 그때의 감정이, 함께 나눈 것들이 서로의 삶에 스며 있는 거라고.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의 뒷모습이 나를 지켜준다는 게 아픔을 잊기 위한 합리화만은 아니라고.
함께한 시간 동안 살면서 가장 다채로운 감정을 느꼈다. 그가 아니었다면 결코 배우지 못했을 것들을 배웠다. 사랑의 여러 색깔과 모양과 깊이에 대해, 나의 면면에 대해, 인간의 마음에 대해. 그 배움이 내 남은 삶을 지탱할 것을 나는 안다.
지금의 나는 그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상대의 어둠이 나의 그림자와 한 몸이 되어가는 일이다. 지난 상처들 때문에 서로에게 새로운 상처를 내지만 결국 아픔들끼리 만나 마주보게 하는 일. 그 사람의 아픔이 내 것이 되는 일. 그 아픔이 나의 색깔로 물드는 일. 나의 온도로 바뀌는 일.
그의 상흔이었던 책장이 나에게 남겨져 응원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서로 잘 맞지 않는 불안정한 퍼즐이었을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연결은, 우리의 노력들은 가치 있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의 나를 이루어준 것들, 어느 한 조각이라도 쉽게 내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진 마시길. 헤어짐은 원래도 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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