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문화난장] 15년 전 ‘페이크’ 범죄 피해 솔비 “그 때 합의 안했어야”

이지영 2024. 9. 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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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장흥 가나아뜰리에 작업실에서 만난 권지안(솔비).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허밍(Humming) 소리를 시각적으로 담아낸 ‘허밍 레터’ 시리즈다. 이지영 기자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9일 가수 솔비(27·본명 권지안)와 닮은 여성이 나오는 음란 동영상을 ‘솔비 매니저 유출 영상’이라며 퍼뜨린 혐의로 김모(18)군 등 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중앙일보 2011년 11월 10일자 22면 보도)

2009년. 얼핏 보면 솔비로 착각할 법한 여성의 음란 동영상이 ‘솔비’의 이름을 달고 올라왔다. 인공지능(AI)이란 말도 생소했던 때였다. 요즘 사회문제로 떠오른 딥페이크가 아닌 그냥 페이크 영상이었다. ‘가짜니까 별일 없겠지’ 하던 사이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충격받은 어머니는 쓰러졌고, 우울증에 빠진 솔비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다. ‘화가 권지안’의 출발이다.

「 가짜 음란 동영상에 우울증까지
치료차 미술 시작, 화가의 길로
조롱 댓글 모티브로 작품 기획
‘아트테이너의 아방가르드’ 평가


붙잡힌 범인들 "재미 삼아 그랬다"


지난달 31일 경기 양주시 장흥면 ‘가나아뜰리에’에서 권지안(40)을 만났다. 그는 2020년부터 가나아뜰리에 상주 작가로 이곳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다.

2006년 3인조 그룹 타이푼의 메인보컬로 데뷔한 솔비는 2012년 첫 개인전을 열며 화가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왜 화가가 됐냐는 질문에 그가 꺼낸 이야기가 15년 전 동영상 사건이다.

문제의 음란 동영상을 사람들은 그의 동영상으로 믿어버렸다. 2년여를 시달리고서야 신고를 했다.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동영상 속 여성이 자신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귓불과 배꼽 등 신체 부위 사진을 찍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거쳤다. 마침내 잡힌 가해자들은 재미 삼아 그랬다고 했다. 감형을 위한 합의를 종용받았고, 결국 합의를 해줬다.

그 과정에서 솔비는 병들어갔다. 계속 눈물이 났다. 대인기피증에 ‘나 하나 없어지면 되지 않을까’란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심리 치료 목적으로 시작한 미술이었기에 처음부터 사물 형태 대신 속마음을 그렸다. 가장 좋았던 점은 그림엔 정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평가에 대한 부담감 없이 자유롭게 작업했다.

“유일하게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비밀친구”였던 미술은 점점 세상에 자신감 있게 자신을 꺼내 보이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용기를 줬다.

‘화가 권지안’에 대해 미술평론가 안현정은 “아카데믹한 전공자들만의 영역과 그들만의 고상한 취미라는 시각을 깨는 아트테이너의 아방가르드”라고 평했다. 그만큼 그의 작업은 혁신적이다.


“사과는 그릴 줄 아니?” 악플 시달려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가수 솔비와 화가 권지안의 협업 프로젝트 ‘셀프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였다. 먼저 주제에 맞는 음악을 만들고 무대에 대형 캔버스를 설치한 뒤 그 위에서 음악에 맞춰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그리고 그 캔버스를 갖가지 크기로 잘라 사각 프레임 속에 집어넣었다. 작품의 주제는 여성 인권과 현대인의 우울 등 그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화가 권지안’의 행보는 점점 바빠지고 있다. 2019년 대중예술인 최초로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무대에 올라 퍼포먼스 페인팅을 펼쳤고, 2021년 바르셀로나 국제 아트페어에서 ‘그랜드 아티스트 어워드’를 받기도 했다. 4일 현재 그의 작품은 천안시립미술관과 포항시립중앙아트홀, 서울 ‘프로세스 이태원’ 등에서 전시 중이다. 이날 코엑스에서 개막한 국제아트페어 ‘키아프서울’에도 5점이 걸렸다.

권지안 작가 '애플' 시리즈 중 하나인 '비욘드 더 애플'(2024)의 일부분. [사진 지안캐슬]

하지만 미술전공자가 아니란 이유에서 그는 악플러들의 손쉬운 타깃이 됐다. “사과는 그릴 줄 아니?”란 조롱의 댓글이 달렸다.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일어나는 ‘사이버 불링(온라인상 집단 괴롭힘)’에 대해서도 그는 작품으로 목소리를 낸다. 사이버 세상을 의미하는 알루미늄 소재로 사과 부조를 만들어 각 부조에 색을 입히고 알파벳을 부여해 언어 정화의 메시지를 전한 ‘애플’시리즈다.

미술을 만난 뒤 그는 단단해졌다. 작업을 통해 상처가 치유되는 ‘성공 경험’이 쌓이면서, 이제 또 어떤 좌절을 만나도 극복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15년 전 그 사건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가해자들과 합의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신을 갉아먹는 범죄다. 당하는 사람 심정은 생각보다 훨씬 무섭고 막막하다. 이건 재미로 할 일이 아니고 굉장히 위험한 범죄라는 사회인식 개선이 먼저다. 그때 더 강경하게 문제 삼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들이 지금의 딥페이크 범죄로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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