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고깃집 접은 재일동포가 전 재산 털어 시작한 일
[김성호 기자]
낯선 영화다. 담긴 목소리 또한 하나하나 낯설다. 오사카에서 고깃집을 하는 자이니치, 즉 재일동포가 자영업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본 일이 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시작 또한 그러하니, 나는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는 얘기가 펼쳐지리라 예상했다. 이를테면 일본인이 버린 고기의 내장을 구워 파는 '호르몬 야키니쿠(내장구이)', 그 지역적 역사성이랄까.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가게를 정리한 주인장 박수남은 그 길로 카메라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해자, 그중에서도 조선인 피해자들의 부당함과 억울함, 억눌린 한을 살핀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온 조선 여인들과 강제징용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착취당한 사내들도 돌아본다.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다큐 인생의 시작점은 저널리즘이다.
박수남의 아버지는 제일교포 1세대 조선인이다. 망국의 자손으로 일가를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었다 했다. 일본 군경과 자경단, 폭도가 된 무리가 패를 지어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한 사건도 가까이서 경험했다. 선하고 의로운 일본인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그가 제 자식들의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썼다고 전한다.
"좋은 일본인에게 보답하는 길은 좋은 조선인이 되는 거란다."
▲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그리하여 박수남은 조선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조선학교라면 북한의 지원을 받는 조총련계 조선학교가 일반적이었고, 그녀가 다닌 학교 또한 그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조선인의 문화와 언어를 학습한 그녀는 졸업 뒤 언론사 기자로 취업한다. 역시 조총련계와 긴밀히 연결된 언론사였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이 생애 전반에 걸쳐 찍은 1만 피트에 달하는 필름, 그 안에 담긴 저널리즘적 기록물을 재편집한 영화다. 뇌졸중에 안구질환까지 겹쳐 고통받는 어머니 박수남을 곁에서 지켜보던 딸 박마의가 직접 편집에 참여해 완성한 다큐멘터리다.
무려 142분, 2시간 20분이 넘는 긴 다큐멘터리는 앞서 적은 감독 박수남의 성장부터 고깃집을 차리고 돈을 벌다 다시 다큐멘터리 촬영에 나선 이야기, 나아가 오늘에 이르는 폭넓은 순간들을 기록한다. 어느 하나 쉬이 버릴 수 없고 버리지 못한, 그리하여 어지럽고 난잡한 인상도 없지 않은 다큐 속에서 관객은 쉬이 만날 수 없는 귀한 순간들을 마주한다.
▲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그녀는 펜 대신 카메라를 들었고, 펜보다 카메라가 적합한 현장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이 난삽한 영화의 주된 관심이라 해도 좋을 조선인 원폭 피해자와 강제징용 문제, 한국어와 일본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마음껏 구사할 수 없는,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비추는 데 글이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자영업으로 번 전 재산을 털어 박수남은 피해자를 찾아 온 세상을 오간다.
박수남이 원폭 피해를 입은 피해자, 노년에 접어든 여성을 대구에서 만난 장면은 특별히 기록할 만하다. 번쩍이는 빛과 뒤이어 닥쳐온 소리, 아름다운 풍경과 모든 것을 부숴버린 후폭풍으로 기억되는 그날의 기억을 여성은 뜨문뜨문 털어놓는다. 이내 해야 할 말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단 걸 느꼈는지 죄송하다며 펑펑 울기 시작한다.
▲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영화의 초입부, 편집해 장황한 필름을 한 편의 다큐로 만들려는 딸이 카메라를 켜고 박수남과 대화하는 순간이 있다. 보다 친절하게 관객에게 다가서는 작품이 돼야 하지 않겠느냔 딸 박마의의 말에 박수남은 역정을 내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답한다.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는 다큐란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박수남은 뇌졸중으로 쓰러지니 딸은 그녀의 의지를 받들어 최대한 그녀가 했을 법한 작품을 만들어나가기에 이른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어떤 영화인가. 어떤 각도에선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여러 사건을 두루 다룬 가치 있는 자료집일 수 있겠다. 또 어떤 시선에선 중구난방 다양한 이야기를 찍은 자료를 되는 대로 이어붙인 영상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이를 박수남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딸의 여정으로 보자면, 제법 성취를 거두고 있는 한 편의 가족드라마이기도 한 것이다.
▲ 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무엇일까. 영화 가운데 몇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극우,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일본 내의 목소리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러시아와 미국, 유럽, 나아가 전 세계에서 2010년대 이후 거세지고 있는 배타주의적인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영화가 집요하게 추적하는 잊힌 이야기들, 파고들고 기록하지 않으면 소실되는 작고 귀한 목소리 또한 '되살아나는 목소리'일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이 주목하지 못했던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먼저 제기하고, 또 군함도를 비롯한 강제징용 문제를, 다시 조선인 원폭 피해자 이야기를 들춰낸 박수남의 작업은 매 순간 그와 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우리 가운데 끄집어내려 했던 것은 아닐지. 그와 같은 시도가 갈수록 귀해지는 세상에서 나는 '되살아나야만 할 목소리' 또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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