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진도 걸어다니며 찾아낸 또다른 보물

이병록 2024. 9. 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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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진도 삼별초 얘기

[이병록 기자]

▲ 삼별초궁녀둠벙 여몽연합군에 쫒기던 궁녀들이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부여 벽화암처럼 뛰어 내려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 이병록
진도(珍島)는 서해와 남해 경계에 위치하며,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3번째로 큰 섬이다. 진도군에서는 한글로 풀이하여 보배 섬이라 부르고 있으나, 나는 보물섬이 더 좋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 '보물섬'에서 해적이 숨겨 놓은 보물 지도와 보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진도에는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진도아리랑, 진도만가 등 알려진 보물단지가 많다. 첫 번째 생각나는 보물은 어렸을 때 마당에서 놀면서 부른 진도아리랑이다. 육자배기조의 구성진 노래라는 전문가 평가를 보니, 이미 남이 발견한 보물이다.

유형 문화재를 꼽으면, 오래전부터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오산 선돌이 보물이다. 진돗개 얘기도 뺄 수 없다. 어렸을 때 이모부가 진돗개를 구했는데, 서울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은 탓인지 오래 살지 못했다. 2020년 10월 발표된 사이언스 논문에 의하면, 진돗개 유전 정보 중 상당량이 뉴기니 고산개와 같은 계통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진돗개 혈통의 이동처럼 이송 수단을 잘 활용하면, 바다가 땅보다 더 이동성이 높다. 삼별초가 진도를 택한 이유는 바다를 통해서 군사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고, 방어적 측면에서는 바다가 육지와 연결을 차단하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것이다. 내가 진도를 걸으면서 찾은 보물은 바로 삼별초다.

강화도에서 일어난 삼별초는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연호를 사용하고 일본에 국서를 보내는 등 자주적 정통 고려임을 내세웠다.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기고, 부산 동래까지 연안의 내륙지역과 제주도까지 세력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다를 통한 이동성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에서 징수한 조곡이 개경까지 운반되지 못해서 고려 정부에 재정적 압박을 가할 정도로 세력이 왕성했다. 삼별초가 용장산성에 들어온 지 아홉 달이 지나서, 김방경과 홍다구의 여몽 연합군이 전선 650척과 군사 1만여 명으로 쳐들어온다. 한때는 아군이었던 고려 관군이 이제는 적이다.

진도와 해안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을 통해서 여몽 연합군의 중군이 들어온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주둔하면서 소규모 해전을 치르다, 명량해전 하루 전에 기지를 옮겼던 역사적인 장소다.

벽파항을 내려다보는 큰 바위 위에 명량해전과 진도 출신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벽파진 전첩비가 있다. 구룡자 역할을 하는 비석 받침 거북이에 다리까지 묘사한 것은 여기서 처음 본다. 해군 초기에는 벽파 해전을 기리기 위하여 '벽파' 이름이 들어가는 함정과 건물이 있었다.

좌군은 노루목(고군면 원포리 해변), 우군은 군직구미(고군면 마산리 뒤산)로 쳐들어온다. 조그만 성에서 10여 일 동안 버틴 것은 대단하다. 궁궐인 용장성은 성터만 남아 있고, 용장사는 우뚝 서 있다. 산성은 비가 와서 포기한다. 배중손 장군 사당이 웅장하여 흐뭇했으나, 이리로 옮겨 지은 사연을 나중에 알게 된다.

승화후 왕온은 아마도 우격다짐으로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아들 왕환과 함께 쫓기다, 홍다구에 의하여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한다. 바로 옆 진도읍으로 가는 재에는 지금도 왕고개 주유소 등이 왕이 죽은 곳임을 알리고 있다. 무덤이 있는 왕고개를 왕무덤재라고도 불렀고, 5~6기 무덤 중 가장 큰 묘가 왕온 묘로 전해지면서, '전왕온묘(傳王溫墓)'라 부른다.

'삼별초궁녀둠벙'은 부여의 벽화암처럼 궁녀가 빠져 죽은 얘기가 전해진다.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재를 넘어서 쫓기다가, 언덕을 내려가 둠벙에 몸을 던졌다. 인터넷에는 여인네 울음소리가 나서 20여 년 전까지 밤에 이곳을 지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씌어 있다.

마주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자신들이 어렸을 때 학교 다니던 길이라 한다. 수심이 깊어서 절굿대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 앞바다로 나온다고 믿었다. 어렸을 때 이곳에서 수영하고 놀았는데, 궁녀가 몸을 던진 바위 쪽은 새파랗게 깊어서 가까이 가지 못했다고 한다. 가서 보니 생각보다 크지는 않은 연못이고, 둠벙이라 하기에는 크다.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 장군은 용장성에서 남쪽 대각선 끝단쯤인 굴포항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본래는 굴포항 부근에 고산 윤선도가 방조제를 만들었던 것을 숭모하며 감사제를 지내던 곳이다. 1999년 배중손 후손들이 이곳에 사당을 세우면서, 윤씨와 배씨 문중 사이에 힘겨루기가 되었던 것 같다.

2003년 진도군이 배씨 문중과 협의하여 배중손 동상과 비석 일체를 용장성 부근으로 옮겨서 갈등을 해소한 것은 잘한 일이다. 사당을 크게 잘 지어 놓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은 무엇일까? 윤선도는 여기가 아니라도 해남 등에 유적지가 많이 있다. 아니면 두 분 사당이 굴포항 부근에 같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벽파항, 용장성, 전왕온묘, 삼별초궁녀둠벙, 굴포항까지를 연결하면 각 유적지를 표시하는 점이 선으로 이어진다. 진도에서 만든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에 얘깃거리(스토리텔링)가 더 풍부해질 수 있다.

배중손이 진도에서 못 이룬 한은 김통정이 제주도에서 잇는다. 삼별초 항쟁이 고려 정부에 대한 반란인지, 몽골에 항복을 거부한 항전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고려군이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싸우다 죽어야 했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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