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색과 붓질로 뭉갠 피사체…형체는 이야기로 채운다 [더 하이엔드]
■ 2024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 ② 서원미 작가
「 지난 2022년부터 9월은 ‘예술의 달’이 되었습니다. 국내 대표 아트 페어 키아프와 세계적으로 가장 ‘힙’하다는 아트 페어 프리즈가 함께 열리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막이 열리는 오늘(4일)부터 서울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관심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겠죠. 한국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도 증폭됩니다.
더 하이엔드가 올해도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주목할만한 이들을 선정, 묵묵히 예술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 아티스트들을 다시 한번 조명합니다.
」
서원미 작가의 그림은 강렬하다. 명암 대비가 확실하고 형상을 잡아내는 붓질은 거침이 없다. 그리고 그 형상을 일부 짓이기거나 뭉개버림으로써 또렷한 이미지 대신 피사체의 뉘앙스로 짙게 남는다. 그 뉘앙스를 뒷받침하는 건 ‘이야기’다. 작가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완주하듯 시리즈를 구성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따라 그림 스타일과 컬러도 변한다. 작가는 최근 언어와 이미지가 하나일 때를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역사적 사건에서 내면 속 이야기로
서원미 작가에게는 하나의 주제를 끈질기게 잇는 힘이 있다. ‘페이싱(facing)’ 연작에서는 거울 속 자아와 객체의 충돌에 대해, ‘검은 장막(The Black Curtain)’ 시리즈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속 인물과 사건을 재해석했고 ‘카니발 헤드(Carnival Head)’는 축제화 된 죽음을 그렸다. 자아·역사·사회의 면면을 탐구했던 작가는 이제 내면 풍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개인전을 통해 첫선을 보인 ‘카우보이 휘슬(Cowboy Whistle)’은 말과 카우보이를 실마리 삼아 내면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그려낸다. 붓질이 지나가 쌓이는 흔적들이 작가의 신체활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림 자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Q : 인물의 얼굴을 뭉그러뜨리거나 피사체의 형태를 지워낸다.
“사실적으로 그리다가 뭉개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감옥이 있어야 탈옥이 가능한 것처럼 구체적인 형상을 벗어나면서 나만의 형상을 찾아간다. 찰나의 감정이나 이미지를 잡아채기 위한 과정이다.”
Q :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트라우마나 불안, 죽음 등 어두운 감정 혹은 내가 무서워하는 것들을 다루곤 했다. 그것을 개인의 경험, 사회의 경험, 심리적 풍경으로 구분해 회화적 언어로 표현했다. 과거 그림들은 입안에 혓바늘이 난 걸 혀로 계속 누르는 것 같았다. 불편함과 고통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니까. 그 과정에서 두려움을 객관화시켜 받아들였다. 비교하자면 지금의 작업은 상처가 난 곳에 비타민을 처방하는 것 같다. 고통은 같고, 객관화도 할 수 있지만 일종의 치유도 함께 진행된다. 어떤 구체적 메시지보다도 그림에 대한 나의 변화가 관람객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Q :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문득 사회와 동떨어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땐 수많은 선택과 결정, 실수와 우연, 즐거움과 괴로움, 선물 같은 순간과 좌절 등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시간이 캔버스 위로 쌓인다. 나의 몸짓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의 상태는 하늘에 붕 뜬 이야기가 아닌 포근한 대지를 발바닥으로 느끼는 것처럼 굉장히 사실적이고 육체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보는 것, 그것이 주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내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Q : 연작을 보면 이야기를 양분 삼아 작업한다는 느낌이 든다. 어떤 이야기에 매료되나.
“시간에 따라 관심사가 변하듯 계속 바뀐다. 요즘 자주 상기하는 건 소설 『돈키호테』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소설의 다각적인 구조처럼 나만의 자유로운 그림을 상상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습득하는 이야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모여 낭독하거나 주고받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말로 전하는 이야기는 생명체처럼 어딘가 소실되고 변화하지 않나. 그런 점은 매일 하루의 기억과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소화하는 사람과 닮았다. 특정 이야기보다 사람의 이야기를 내면화하는 데 더 집중한다.”
Q : 이번 키아프 서울에서는 어떤 작품을 볼 수 있나.
“최근 연작인 ‘카우보이 휘슬’이다. 말하는 말(語)과 동물의 말(馬)은 동음이의어다. 그림에 담고 싶은 ‘말’이 많아 장난처럼 ‘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캔버스 위로 카우보이를 불러들였고, 거기서 이미지가 확장됐다. 구석기 동굴벽화부터 연극, 영화, 개인의 기억까지 내면의 풍경에서 숨바꼭질하듯 찾아낸 이미지들이 연극을 벌이듯 등장한다.”
Q : 최근 관심사는.
“집과 작업실을 파주로 옮기니 보이는 것들이 달라졌다. 빽빽하고 복잡한 도시 풍경을 보다가 낮은 건물들, 한적한 거리, 쉽게 변화하지 않는 풍경들을 접하니 그림에 여백이 생기고 있다. 마음 둘 데가 많아지는 기분이다. 이러한 일상 속 변화를 계속 느끼고 있다.”
■ 서원미 작가는…
「 1990년 출생.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보안여관(2019), 서울 아트비트 갤러리(2019), 서울 아터테인(2021), 서울 파이프 갤러리(2022), 서울 라흰갤러리(2023)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올가을, 키아프 서울을 시작으로 종근당 예술지상 단체전(세종미술관), 개인전(아터테인)을 열 예정이다.
」
이소진 기자 (lee.soj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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