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말잔치, 여성들은 신물이 난다
[정현백]
▲ 8월 31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청계천 광교(영풍문고) 앞에서 진보당이 주최한 '딥페이크 성범죄 강력수사 촉구' 집회가 열렸다. |
ⓒ 김화빈 |
여성들은 거리에서 분노하고, 절규하고 있다. 이미 서울대 사건에서 보았듯이 텔레그램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이용해 친구·가족·지인의 얼굴에 음란물을 합성해 퍼뜨리는 딥페이크 성범죄가 드러나면서 여성들은 물론 온 국민이 불안에 떨면서 경악하고 있다. 가해자가 한 대학의 동문이었다는 피해자는 "인간관계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타격"을 입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강의는 물론 학생 식당에서의 식사, 과제와 스터디 등 학교 생활의 거의 모든 국면에 가해자를 포함한 이들을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별, 학교별로 불법 합성물을 공유하는 방이 있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에 능욕을 하고, 교사는 이런 제자를 학교 현장에서 매일 대면해야 하는 참담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범죄가 더욱 끔찍한 이유는 가짜(fake)가 진짜(reality)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매일의 일상과 친밀해야 하는 관계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뭘 했나
지난 8월 30일 저녁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여성들은 분노하며, 정부의 미진한 대응 탓에 끔찍한 피해를 유발하는 디지털 성범죄가 계속 일어난다고 성토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데도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소리치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도모하는 것 말고 윤석열 정부가 무엇을 하였는가를 반문하였다. 또한 여성들은 성차별 문화를 용인해 온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국가의 책임 회피에 분노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철저한 수사를 통해 딥페이크를 뿌리 뽑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화들짝 놀란 경찰청도 8월 27일 딥페이크 성범죄 근절을 위해 시·도 사이버 성폭력 수사팀을 동원하여 내년 3월까지 집중 단속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저 '입으로만 하는 약속'에 여성들은 분노하고, 신물을 내고 있다.
실제로 딥페이크를 쉽게 만들 수 있는 텔레그램 채널에 수십만 명이 참가하고 있는데, 전국 사이버성폭력 수사팀 인력은 131명에 불과하다. 대전, 광주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전담 인력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처벌을 강화해서, 딥페이크를 막아보자는 것이다. 처벌이 낮은 것도 문제지만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 우선이다. 딥페이크는 인공지능의 진화 과정에서 동반될 수 있는 부작용으로써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지금 시민들은 윤석열 정부가 그동안 무엇을 대비했는지, 딥페이크로 인한 여성들의 피해와 공포감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 사이버 성폭력 문제는 근원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 혐오 문화에서 기인한다. 여성을 친구-동료-가족-시민의 자리에 위치 짓지 않고 대상화 해 놀잇감으로 여기는 것이 이 폭력의 핵심이다. 여성 혐오를 양산·방조하는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규제와 온라인 혐오 표현에 대한 단호한 대책이 시급하다. 나아가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더 적극적인 민주시민교육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괜한 우려가 아니라, 책정된 내년 예산에서도 잘 드러난다. 딥페이크 확산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관련 예산은 올해보다 3억 원가량 증가한 50억 7500만 원이 편성되었으나, 불법촬영물 삭제 지원을 실제로 전담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예산은 올해 34억 7500만 원에서 내년에는 32억 6900만 원으로 삭감된다고 한다. 이 기관 실무자들의 수고와 노력 없이는 실제로 피해자 지원은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이 기관의 핵심 문제는 인력 확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어서, 실제로 현재 39명인 실무자가 1인당 100명 이상의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불법촬영물 식별 기술 고도화를 위해 약 30억 원의 예산 배정을 요구하였지만, 이는 반영되지 않았다고 한다.
디지털 성범죄 예산만 문제인 것이 아니다. 내년 여성가족부 예산은 올해보다 5.4% 증가한 1조 8163억 원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면서 예산이 늘어난 것은 기이한 일이지만, 대체로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도의 증가율이다. 조금 증액된 내년 여성가족부 예산안을 통해서 지금 이 부처가 중점을 두는 가치와 사업은 출산·돌봄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출산과 돌봄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도 성남시 HD현대 글로벌R&D센터 아산홀에서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제로 열린 2024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6.19 |
ⓒ 연합뉴스 |
위의 정책들에서 출생률을 높이겠다는 조급증은 드러나는데, 저출생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미래 불안을 완화하려는 진정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저출생의 구조적 원인인 좋은 일자리 부족, 성별 임금 격차, 공교육 부실, 지역 격차 문제 등에 대한 근본적·장기적 대안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집중하려는 핵심 정책은 결혼과 출산을 하였거나 그럴 계획이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여러 여론조사를 보면 결혼과 출산 계획이 있다는 미혼 남녀가 50% 안팎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게다가 고용보험 조건을 충족할 수 없는 파견직, 계약직이나 자영업자 등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은 사실상 지원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여성계가 우려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구 위기 대응 정책에서 성평등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이다. 2023년 한국은 성별 임금 격차가 33.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는 늘어났지만, 경력 단절은 여전히 심각하다. 또한 남녀 모두에게 고용 불안은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국제적인 비교연구에 따르자면, 성차별이 심하거나 성별 분업 관행이 강했던 국가에서 성평등이 실현되면, 초기에는 출생률이 낮아지지만, 성숙 단계로 가면 그 비율이 높아졌다. 선진국들의 인구 위기 대응에서 성평등이 강조되었던 이유는 그만큼 다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2019년 문재인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기본계획의 수정보완판에서 '삶의 질 제고'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하였다. 여기에서는 합계출산율보다 오히려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이나 성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의 실현을 그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저출생 문제를 좀 더 복합적으로 접근한 고민의 결과였다.
윤석열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언하였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예산의 출처도 밝히지 못하고 있고, 여성가족부의 예산 책정에서 드러나는 대로 인구 위기에 대한 진정성 있는 대응도 느껴지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말잔치보다는 한국 사회 젠더 질서의 변화, 나아가 글로벌 사회의 동향에 대한 보다 '질 높은 학습'이 필요한 듯하다.
여성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소란스레 홍보하고 있는 인구 위기 대응 문제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여성가족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언하니, 여성가족부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김현숙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 2월에 퇴임한 이후, 장관직은 공석으로 남아 있다. 정부 부처 중에서 여성가족부만큼 다른 부처와의 협력과 공동사업이 요구되는 곳은 없다.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등과의 밀접한 공동 작업 없이는 성평등도 저출생 위기 극복도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6개월 동안 여성가족부는 장관이 없는 부처로 일하고 있다. 스웨덴 같은 국가에서는 성평등 담당 장관과 노동 담당 장관을 한 부처에 두고 두 사람이 공동 장관을 맡아 긴밀히 연결된 두 업무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고용노동부는 일터에서의 성희롱과 성차별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고용평등상담실 운영 예산을 삭감했다. 이런 지경이니 지금 대통령이 말하는 젠더 폭력 근절 지시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 정현백 전 장관 |
ⓒ 사의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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