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일본 국적"... 김문수 장관의 짝사랑이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9. 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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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국적법 미적용, 별도의 호적제도... 일제는 일본인과 한국인 엄격하게 구별

[김종성 기자]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있다.
ⓒ 남소연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의 지론은 한국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었다는 것이다. 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그는 이재강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부터 "김문수 장관은 일제 치하에서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말했다"라는 지적을 받았다.

김 장관은 "의원님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면 어디 국적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런 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럼 손기정 선수도 잘못된 것인가?"라고 발언했다.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것은 일본 국적이 아니면 국적을 가질 수 없었던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냐고 되받아친 것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한 말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였으므로 한국인은 일본 국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김문수 장관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 선조들은 일본인이었다'는 자신 있게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적법 한국에 적용하지 않은 일제

일본은 한국인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한 1910년 이후에도 한국인의 국적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22일에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가 서명한 한일병합조약 제1조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고 함으로써 한국인에 대한 관할권을 일본에 넘겼다.

대한제국 국민의 국적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말은 없었다. 모든 통치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간접적 표현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해 대만을 차지할 때는 달랐다. 1895년 4월 17일 체결된 청일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마관조약·하관조약) 제5조는 향후 조약이 발효되고 2년 내에 대만을 떠나지 않는 대만인은 "일본국의 편의에 따라 일본 국민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때는 국적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뤘던 것이다.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에서 국적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은 이유와 관련된 문건이 있다. 일본의 식민지 법률정책에 관여한 야마다 사부로 도쿄제국대 교수가 병합조약 1개월 전인 1910년 7월 15일 데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한 '합병 후 한국인의 국적 문제'라는 의견서가 그것이다. 작년에 <일본 비평> 제29호에 실린 엔도 마사타카 와세다대학 연구원의 논문 '호적을 통해서 본 국적: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야마다의 의견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과거 한국 신민(臣民)인 자는 합병에 따라 일본국적 취득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이 일본인과 완전히 동일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외국에 대항해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본 이외의 국가로부터 일본인 취급을 받도록 만들기 위해 한국인을 일본 국민으로 인정하는 것일 뿐,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는 의견서다. 병합조약에서 국적 문제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격에 두지 않으려는 인식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을 가능케 하는 자료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해 놓고도 한국인을 자국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일에서만큼은 소극적이었다. 국적법을 한국에 적용하지 않은 사실에서도 그 점이 드러난다.

2014년에 <공법학연구> 제15권 제2호에 실린 최경옥 영산대 교수의 논문 '일본 국적법의 체계와 운용'은 "국적법이 그 당시 식민지에도 적용"됐다면서 "1899년(명치 32년) 칙령 28호에 의하여 대만에 적용되었으며, 1924년 4월 16일의 칙령 제88호에 의하여 사할린에 시행"됐다고 한 뒤 "조선에는 시행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강점한 대만과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뒤 강점한 사할린에는 국적법을 시행하면서도 한국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국적법 제20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제20조는 외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본 국민은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는 조항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강점되기 전부터 한국인들은 강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친일정권이 거들지 않으면 강점이 성사되기 힘들 정도였다. 한국 바로 옆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있었다. 그래서 강점 이후에도 중국과 러시아를 무대로 항일운동이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었다.

일본이 국적법 적용을 꺼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국인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일본 국적자가 아닌 상태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면, 일본 정부가 이들에게 일본 형법을 적용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제3국 국적을 취득해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을 일본 형법으로 처벌할 목적으로 식민지 한국에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912년에 수립된 중화민국이 한국인들을 귀화시키려고 노력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에 <한국학논총> 제32집에 게재된 최계수 국민대 연구원의 논문 '미귀환 재중한인의 국적 귀속 문제'는 중국 정부가 귀화를 장려한 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것은 이주 한인들이 중국에 귀화하면 중국인이 되기 때문에 일본의 간섭이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막을 목적으로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일본 기록에도 나타난다. 위의 엔도 마사타카 논문에 따르면, 1925년 11월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제51회 제국회의 설명자료'는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와 관련해 "그들이 지나의 국적을 취득했을 경우 지나 영토에서 배일운동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시도하더라도 우리에게 단속할 방법이 없고"라고 말한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해 중국 영토에서 배일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해 국적법을 한국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식민지 한국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문수 장관은 '우리 선조들은 일본 국민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의 일본 정부는 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김문수 장관의 짝사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 선조는 일본인'이라는 주장의 허구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과 별도로, 일본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했다. 혈통주의와 호적제도가 그 수단이었다.

엔도 마사타카 논문은 "일본 국적법은 1899년에 제정된 이후 일관되게 혈통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라며 "어떤 사람이 일본 국적을 가졌는지 아닌지는 호적에 기재된 일본인과의 친자관계로 증명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인의 혈통을 물려받고 일본인 호적에 얹힌 사람이 법적으로 완전한 일본인 즉 내지인으로 인정됐다는 이야기다.

일본은 대륙 침략전쟁 막판에 다급해졌을 때는 한국인에게도 병역의무를 인정했다. 패망 5개월 전에는 한국인에게 일본 중의원 선거권까지 주려 했다. 일본이 그전까지 병역의무와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한국인들이 일본 호적에 등록되지 않아 완전한 일본인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본 병역법은 자국 호적법의 적용을 받는 내지인에게만 병역의무를 부과했다. 일본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데에 국적법보다 호적법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전황이 다급해지자 병역법에서 호적 조항을 삭제하고 식민지인들에게도 병역의무를 강제했던 것이다.
▲ '표 1' 본문에 인용된 엔도 마사타카의 논문.
ⓒ 엔도 마사타카, 서울대 일본연구소
엔도 마사타카 논문의 '표 1'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은 일본열도와 사할린에는 내지호적 제도를 적용하면서도 한국과 대만에는 별도의 호적체계를 시행했다. 일본인의 혈통을 물려받고 내지 호적에 등록되지 않는 한 완전한 일본인이 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슴에 일장기를 단 손기정 선수도 완전한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말로는 내선일체를 운운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엄격히 구분했던 것이다.

김문수 장관은 거듭거듭 '우리 선조들은 일본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6일 인사청문회 때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랬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우리 선조들'이 일본인들의 친자로 인정돼야 하고, '우리 선조들'이 내지호적에 올랐어야 한다. 그의 망언은, 한국인 핏줄을 타고나고 한국 호적에 등록된 사람은 일제에 아무리 충성해도 완전한 일본인으로 대우받을 수 없었던 일제강점기의 차별구조와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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