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나타난 '식인 멧돼지'... 그렇게 시작된 사건
[양형석 기자]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괴수 영화는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1300만)과 2007년 심형래 감독의 <디워>(842만)가 흥행하면서 국내 시장이 개척됐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무엇보다 두 영화 모두 관객들에게 어색하지 않은 CG 장면을 잘 표현하면서 좋은 이야기만 있다면 괴수물에서도 충분히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고무적이었다.
아쉽게도 <괴물>과 <디워> 이후 '한국 괴수물의 르네상스'는 열리지 않았다. 2012년 <7광구>와 2018년 <물괴> 같은 한국형 괴수물이 차례로 개봉했지만 하나같이 관객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2015년 호랑이 사냥을 소재로 만들었던 박훈정 감독의 <대호> 역시 150억 원이 넘는 제작비와 최민식이라는 대배우를 캐스팅했음에도 전국 176만 관객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의 괴수 및 식인 동물이 등장하는 영화들의 제작이 위축되는 사이 크리처물은 OTT로 옮겨가 <스위트홈>과 <경성크리처> 등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난 2009년에도 식인 멧돼지를 소재로 한 독특한 스타일의 한국 괴수물이 개봉해 관객들의 관심을 끈 적 있었다. 고 신정원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였던 엄태웅·정유미 주연의 <차우>였다.
▲ 5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식인 맷돼지를 잡기 위한 추격대를 결성했다. |
ⓒ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
이후에도 짐승의 짓으로 추정되는 살인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이장은 사냥꾼 백포수(윤제문 분)를 섭외해 멧돼지 사냥을 맡긴다. 백포수와 그의 팀은 노련하고 재빠르게 멧돼지 사냥에 성공한다. 백포수가 잡은 멧돼지는 사람들을 죽인 멧돼지가 아니었고 실제 사람을 죽인 변종식인 멧돼지 '차우'는 마을회관의 잔치현장을 습격해 사람들을 공격하며 마을회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김순경과 백포수, 천포수(장항선 분), 생태연구원 변수련(정유미 분), 신형사(박혁권 분)는 각자의 이유로 식인 멧돼지 '차우'를 잡기 위해 추격대를 구성해 산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산속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추격대는 김순경의 희생과 변수련의 기지를 통해 무거운 엘리베이터를 떨어트려 멧돼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동굴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차우'를 사냥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 <차우>는 식인 멧돼지를 사냥하는 이야기지만 신정원 감독은 '차우'를 죽어 마땅한 잔인한 짐승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차우'는 주말 농장을 개발하면서 산의 자원들을 무분별하게 개발한 인간들 때문에 산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인간의 묘지까지 내려와 식량을 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식인 멧돼지가 등장한 것은 인간의 욕심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엄태웅이 2009년 <선덕여왕>의 김유신 역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차우>에 출연했다. 엄태웅은 서울에서 상매리 파출소로 발령받은 김순경 역을 맡아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을 펼쳤다. 영화 중반에는 '나이 많은 후임' 박순경(정윤민 분)에게 <시실리 2km>의 명대사 "소풍 왔냐?"를 시전하기도 했다.
▲ 정유미는 <차우>에서 욕망 넘치는 4차원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을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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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선 배우가 연기한 천일만은 삼매리에서 총포상을 운영하는 전설적인 포수로 유학파 포수 백만 배의 스승이기도 하다. 천포수는 식인 멧돼지에게 손녀를 잃고 복수를 하기 위해 추격대에 합류했다(사실 손녀를 죽게 한 것은 '차우'가 아닌 음주운전을 한 뺑소니 운전자들이었다). 천포수는 경력이 오래됐고 마을에서도 오래 살아 추격대에게 멧돼지와 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시실리 2km>에 이어 신정원 감독의 영화에 연속으로 출연한 박혁권은 삼매리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파견된 강력계 형사 역을 맡았다. 처음에는 시골 형사들을 무시하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추격대, 특히 김순경과 인간적인 정을 나눈다. 박혁권은 <하얀 거탑>과 <펀치>, <육룡이 나르샤> 등 주로 드라마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2010년대까지는 영화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배우다.
▲ <차우>는 일주일 늦게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에 밀려 2009년 여름 시즌에 장기 흥행을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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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타이즈로 구성된 임창정의 <슬픈 혼잣말>, <소주 한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경험을 쌓은 신정원 감독은 2004년 갓 서른이 된 젊은 나이에 영화 <시실리 2km>를 연출하면서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공포와 코믹이 묘한 조화를 이룬 영화 <시실리 2km>에는 현재 대배우가 된 김윤석을 비롯해 박혁권과 우현, 최원영 등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대거 조연으로 출연했다.
데뷔작을 통해 2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신정원 감독은 약 5년의 공백 끝에 2009년 7월 신작 <차우>를 선보였다. 박혁권을 제외한 주요 배우 대부분이 교체된 <차우>에서 신 감독은 공포와 코미디, 괴수물,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해 특유의 묘한 장르를 만들었다. <차우>는 전국 179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전했지만 천만 영화 <해운대>에 밀려 장기 흥행에는 실패했다.
<시실리 2km>와 <차우> 사이에 5년의 공백이 있었던 그는 3년이 지난 2012년 3번째 영화 <점쟁이들>을 들고 나왔다. 신정원 감독이 연출한 4편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신 감독이 각본을 쓰지 않았던 <점쟁이들>은 무속과 오컬트를 조합한 코믹 호러 영화로, 감독 자신의 색깔을 더욱 강하게 입혔다. 하지만 관객 수 95만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다.
지병으로 간경화를 앓던 신정원 감독은 2019년 이정현과 김성오, 양동근, 서영희 등 개성 있는 배우들이 출연한 신작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의 신작은 코로나19로 인해 극장가가 침체에 빠진 2020년 9월에 개봉해 전국 10만 관객에 그쳤다. 그리고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을 유작으로 남긴 채 2021년 12월 패혈증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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