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안 최상위층 노부인의 반전...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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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
ⓒ 열린책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42페이지 제목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낭시대학 행동생물학연구소에서 실험을 했다. 쥐 여섯 마리를 한 우리에 넣었다. 먹이가 든 사료통은 수영장 건너편에 있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모두 헤엄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실제 헤엄친 쥐는 세 마리였다. 여섯 마리 중에 가장 힘이 센 두 마리는 안락한 우리에 가만히 있다 애써 헤엄쳐 가져온 두 마리 쥐의 먹이를 빼앗아 먹었다. 헤엄친 다른 한 마리의 쥐는 먹이를 뺏지도 빼앗기지도 않고 혼자 먹었다. 헤엄치지 않았던 마지막 한 마리의 쥐는 가장 힘이 약했다. 그 쥐는 다섯 마리 쥐들이 뺏고 뺏기는 싸움을 끝낸 후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책에서는 이들을 착취형, 피착취형, 독립형, 천덕꾸러기형으로 분류했다. 연구자는 스무 개의 우리를 만들어 똑같은 실험을 했다. 결과는 어느 우리에서나 피착취형 두 마리, 착취형 두 마리, 독립형 한 마리와 천덕꾸러기형 한 마리의 계급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착취형에 속하는 여섯 마리를 따로 모아 한 우리에 넣었다. 쥐들은 밤새도록 싸웠다. 다음 날이 되자 그 역할은 똑같은 방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2011년에 출간된 632쪽짜리 벽돌 책을 그해 구입해서 한동안 끼고 살았는데 읽을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머리에 박힌 내용이다. 감히 쥐 세계와 인간 세계를 한 범주에 넣고 다룰 수 있느냐는 거부감도 있겠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 분류 체계상 인간과 쥐는 종속과목강문계 중 동물계와 척삭동물문에 포유강까지는 같은 분류 안에 있는 동물이다.
영장목에 함께 이름을 올리는, 인간의 유전자와 98.4%가 동일하다는 침팬지 세계도 가장 힘센 수컷 대장 밑으로 공동체의 끄트머리 개체까지 일목요연한 서열사회다. 그들은 생존이 걸린 먹이와 서열을 확인하는 털 고르기에 이어 자기 유전자를 퍼트리는 교미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힘을 중심으로 한 서열을 따른다.
우간다 은고고의 한 침팬지공동체를 20여 년 이상 관찰한 다큐멘터리에서는 약한 수컷들끼리 동맹을 맺고 마구잡이로 폭력적인 대장 수컷을 '다구리'로 강등시키는 정치 수완도 보여준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쿠데타인 셈이다. 하물며 침팬지 사회도 어리석거나 폭력적인 지도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처럼 본능적으로 사회에 유익하지 않은 지도자를 하위 개체의 동맹으로 몰아낼 줄 안다. 아무튼 쥐보다 한층 세련된 그들 사회도 서열을 중심으로 한 계급 사회다.
인간 사회는 계급사회
인간 사회도 대놓고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계급사회다. 그럼 너는 공산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십수 년 전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인간 본성을 깨닫는 (나름의) '득도'를 한 후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은 진정한 공산제를 할 자격이 애초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꼬뮨'을 버린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우리나라에 살아남은 울타리 공동체는 둘 중 하나다.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있는 공동체 아니면 영성 혹은 종교 공동체다. 이 사실이 함의하는바, 인간이 만든 집단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들어 낸다. 해서 그게 신이든 신에 버금가는 사람이든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야 집단 내 질서가 유지된다.
카리스마 공동체는 지도자가 죽으면 분열되고 해체된다. 지도자의 영도력으로 잠재되고 드러나지 않았던 구성원들 사이의 각종 이해관계가 화산처럼 분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영성이나 종교 공동체는 아무리 해도 결코 죽지 않는 혹은 인간에 의해 죽을 수 없는 정령과 신의 중재로 명성만큼은 오래 유지 된다. 그러니까 겉모습은 오래 변함이 없는데 안에 사는 사람들은 수시로 자주 바뀐다. 대체로 그 이유는 살아생전 결코 풀지 못할 인간의 영원한 난제 중 하나 즉 관계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유로든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이 싫어질 때도 있는 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미워질 때는 안 보는 게 가장 좋은 상책인데 울타리공동체는 그런 상책이 통하지 않는 구조다. 이게 우스워 보여도 직접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고작 그런 문제로 사람이 어디까지 옹졸해지고 괴로워질 수 있는지를. 무신론자인 나도 이럴 때는 오직 신으로부터의 구원이 역사 되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마구 끄덕거린다.
어쨌든 공동생산과 공동분배의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 공동체도 사실은 다양한 층위의 분업과 질서가 있고 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힘 센 게다가 무리의 존경까지 받아야 하는 '대장'이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빌리지 않아도 별수 없이 인간 사회는 계급사회다. 누군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누군가는 그걸로 생산하고 소비한다. 과거의 방직기계가 지금은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그리고 인공지능(AI)과 로봇과 드론으로 발전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럼 완전한 평등사회는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내 대답은 즉각적이고 적확하다. 불가능하다. 완벽하게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한 사회는 언어도단이다. 다만 완전한 사회를 위한 꾸준한 시도가 인류 문화를 공정하고 평등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촉매로 작용해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시도를 부단하게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AI가 만든 이미지 |
ⓒ 김지영 |
섬에서 가족들은 평화를 찾았고 나는 건설목수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내 일상은 노동과 독서와 글쓰기였다. 가족의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는 가장으로서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나의 불투명한 삶의 전망을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7년을 살다 나왔지만 제주도에서 뼈를 묻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우리는 다시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나는 계속 고민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 때, '쥐 세계의 계급 제도'는 방향 잃은 배가 발견한 등대와 같았다.
물론 인간 사회의 서열과 계급은 단순히 폭력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가족, 재산, 학력, 재능 등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한다. 하지만 큰 범주로 보면 쥐 세계의 계급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누구로부터 뺏지도 않고 누구에게 뺏기지도 않는 홀로 자유로운 독립형 인간으로서의 삶은 (사실은 귀농을 위해 서울을 떠난 때부터 살고 있었지만 그리고 연이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마침내 살아야 할 삶이었다.
그 전에 내가 홀로 당당하게 살기보다 가장으로서 중요한 건 가족의 삶이었다. 우리는 벌써 육지와 섬을 넘나드는 몇 차례 이주의 역사를 통해 행복은 꼭 어디를 가야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그곳이 어디든 지금 서 있는 곳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었지만 생활을 위협하는 경제적 빈곤에 빠진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꾸준하게 돈을 벌어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재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독립형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회사원이 아닌 건설목수를 하게 된 계기였다. 무엇을 하든 부자가 될 자신은 없었지만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아도 아이들 키우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살아온 그런 삶에 그래도 의문을 가지고 있던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내 삶의 방식이 그런대로 틀리지 않았다는 걸 대신 말해 주었다.
"아빠. 나는 우리가 부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품위 있어 보이는 노부인의 반전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든 독립형 인간의 삶을 계속 살아도 되었다. 제주를 떠나 고향에 잠깐 머물렀다가 서울에 정착한 뒤로 개인택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순전히 늙어서까지 부양해야 할 늦둥이 딸 때문이었다.
아니어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노동을 계속해야 건강한 삶이라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의 시작은 80대 중반까지 노동을 멈추지 않았던 내 어머니의 건강한 삶으로부터였다.
개인택시는 늙어서도 서울에서 독립형 인간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직업이었다. 읽고 쓰고 노동하는 모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주체성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거면 됐다. 택시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시선은 자존감 낮고 자존심 센 말하자면 되게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신경 쓰는 겉치레일 뿐이다.
과거에 실패했던 삶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서울에 와서도 나는 낮에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 운전대를 잡았다. 앞으로 족히 20년은 가족과 내 삶에 중요한 살림꾼이 되어야 할 택시가 내게 맞는 직업인지 직접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인간의 사유가 아무리 출중해도 몸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그동안의 실패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만난 손님 중에 강남의 고급 요릿집 앞에서 태운 일가족이 있었다. 한 눈에도 품위 있어 보이는 노부인과 아들 며느리였다. 덕분에 운전도 교양 있게 얌전해질 정도였다. 자녀들도 모두 전문직이거나 썩 괜찮은 직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들 대화의 주제가 노부인 남편의 승진 문제로 향했다.
운전하고 있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구체적인 이름이나 기관 등은 조심하고 있었지만 대화의 맥락으로 보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곳의 수장 자리였다. 그들은 낙관하고 있는 그 자리가 결정되기까지 해결되어야 할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와 생각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다 대화가 가지를 치기 시작하더니 정치 이야기로 넘어가고 정권으로 비화되면서 한쪽 진영의 지도자 이름까지 거론되더니 갑자기 노부인의 입에서 몹시 세속적이고 상스러우면서 노골적인 욕이 튀어나왔다. 교양 있게 얌전히 운전하던 내가 움찔할 만큼의 반전이었다.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살며 고위직 남편에 전문직 자녀와 일등급 손주들까지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더 이상 올라갈 데 없는 최상위층 노부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선정적인 욕설이었다. 게다가 당사자가 앞에 있으면 당장 머리라도 쥐어뜯을 것 같은 기세였다.
▲ 택시 |
ⓒ 이희훈 |
두 페이지짜리 '쥐 세계의 계급 제도'에서 내가 아직 소개하지 못한 사연이 더 남았다. 그나마 내가 가진 의문에 약간의 실마리가 될 내용이다. 있는 그대로 옮긴다.
"연구자인 드조르는 더 커다란 우리에 2백 마리의 쥐들을 넣어서 실험을 계속했다. 쥐들은 밤새도록 싸움을 벌였다. 이튿날 아침 세 마리의 쥐가 털가죽이 벗겨진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결과는 개체 수가 증가할수록 천덕꾸러기형의 쥐들에 대한 학대가 가혹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이 실험의 연장선에서 쥐들의 뇌를 해부해 보았다. 그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는 천덕꾸러기나 피착취형 쥐들이 아니라 바로 착취형 쥐들이었다. 착취자들은 특권적인 지위를 잃고 노역에 종사해야 하는 날이 올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가난해도 늙어서는 더욱 단순하게 돈을 벌고 머리는 맑게 쓰자는 내 생각이 그런대로 이치에 맞는 거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우리는 물론 쥐와는 차원이 다른 복잡한 세계를 살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서로의 세계를 관통한다. 인생은 '독고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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