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되어 사라질 파스텔 대작… 예술의 영원함에 대한 물음
정상의 시각예술가 국내 첫 개인전
겸재 ‘박연폭포’ 닮은 거대한 폭포 등
한국미술사 재해석 작품으로 눈길
육중한 기둥 사이 계단 위에 폭포를 그린 그림이 제단화처럼 걸려 있다.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박연폭포’를 연상시킨다. 기세 좋게 흘러내리는 폭포를 품은 암벽이 검지 않고 붉은 색이다. 게다가 젤리처럼 몰캉한 느낌이라니.
바위가 유기체처럼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기괴하고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마법이 펼쳐진다. 여기엔 파스텔로 그린 그림이라는 비밀이 숨어있다. 또 다른 이유는 과거의 미술사를 현재로 불러내 한 시공간에 섞이게 만드는 비선형성에 있을 것이다.
18세기 로코코 이래 ‘하찮은’ 미술 재료로 취급받던 파스텔을 사용해 주류 미술계를 ‘정복한’ 스위스 시각예술가 니콜라스 파티(44)가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개인전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를 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6월 재개관을 한 뒤 고미술 중심이었던 전시 성격을 현대미술로 확장한 호암미술관이 개인전으로 초대한 첫 외국인 작가다. 파스텔화의 마법사 니콜라스 파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시 제목 ‘더스트(먼지)’는 작가의 인문학적 깊이를 웅변한다. 그는 가루가 날리는 파스텔의 속성을 먼지에 비유함으로써 아연 생성과 소멸, 생로병사의 환희와 쓸쓸함으로까지 사유를 확장한다. 그가 손을 대면 먼지처럼 폴폴 날리는 파스텔의 일시적인 속성은 아연 사라진다. 대신 작품 속 이미지는 캔버스 안에 영구히 보존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얻는 마법을 부린다. 정물화든 풍경화든 파티의 작품에서는 인간이 연상이 된다.
니콜라스 파티는 고대부터 근·현대를 아우르는 미술사를 참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에게 서양미술사는 영감을 얻는 보물창고다. 예컨대 과일 그림에서는 과일들이 서로 나른한 몸을 기댄 듯 포개져 있는데 정물화임에도 육감적인 냄새가 난다. 이 작품 ‘정물’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1862)을 참조했다고 한다. 또 인체의 깊숙한 일부나 그 변형, 또는 내장이 연상되는 유선형 형태에 곤충들이 붙어 있어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주름’ 연작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브론치노의 해부학적 인체표현을 참조했다.
그는 이번에 새로운 시도를 했다.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하면서 그가 잘 모르는 한국미술사의 전통을 가져온 것이다. 조선시대 산수화를 참조한 계단 위 ‘폭포’ 그림처럼 말이다.
또 조선 후기 화원화가 김홍도의 ‘군선도’, 조선시대 궁중회화인 ‘십장생도 10곡병’ 등을 참조해 상상 속 팔선(八仙)의 초상을 제작했다. 김홍도 특유의 ‘정두서미 용법’(시작은 못의 머리처럼 두껍고 끝은 쥐의 꼬리처럼 가늘어지는 선) 옷 주름으로 표현된 인물의 얼굴 위로 두 마리 개가 족두리처럼 늘어져 있는 초상, 얼굴 주위로 복숭아가 가득 열려 있는 초상, 리움의 자랑거리인 국보 ‘청자진사연판문표형주자’가 함께 있는 초상 등이 그런 예다.
전시장에는 ‘군선도’ ‘십장생도 10곡병’ ‘청자진사연판문표형주자’ ‘당간지주’ ‘서수상’ 등 실제 소장 유물도 적절히 배치했다. 한국미술사 전통을 재해석한 전시라는 느낌을 풍부하게 하면서 주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곽준영 리움 전시기획실장의 관록이 느껴진다. ‘주름’ ‘곤충’ 연작이 있는 방에 함께 전시된 겸재 정선의 ‘노백도’는 존엄한 노년에 대한 사유로 이끄는 힘이 있다.
서양미술사는 작가가 체화시킨 자신의 역사다. 하지만 한국미술사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접한 낯선 미술사다. 작가는 그런 이유로 리움의 고미술 컬렉션을 활용해 작업을 할 때 리움 측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이 달항아리를 제안하자 서양인에게 빤한 달항아리 대신에 왕실 후손의 태를 보관하는 백자태호를 리움 측이 제시한 걸 예로 들었다.
그러다보니 서양미술사를 참조한 작품에서는 ‘과일=여인’처럼 오랜 발효 끝에 나온 시적 은유가 있지만 한국미술사를 참조한 작품에서는 즉물적인 이미지만 있다. 십장생도에서 복숭아가 지닌 상징에 대한 고려는 없다. 도자기도, 복숭아도, 사슴도 초상 위에 장식처럼 둘러쳐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미덕은 있다. 한국의 현대 미술계에 우리 전통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자극제가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나콜라스 파티 효과’는 충분하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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