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시시각각] 압축파일을 풀어야 할 시간
“대안을 누가 딱 제시한다면 노벨상 10개는 받을 겁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에서 이 말만 기억에 남는다. 저출생 문제에 획기적 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정부의 성과와 개혁 의지로 채워진 2시간 회견 대부분이 옛 도덕 교과서처럼 진부하게 느껴진 반면, ‘개혁이 어렵다’는 메시지엔 공감이 됐다.
개혁에 대한 소신도 조감도처럼 설명했는데, ‘저출생 문제는 사회구조적·문화적 문제며, 의료·노동·교육·연금 개혁이 동전의 양면처럼 뒷받침돼야 하고, 지역 균형 발전으로 국민의 불필요한 경쟁을 덜어줘야 인생과 가정에 더 많은 가치를 두게 된다’는 얼개였다. 어렵고 또 어려운 과제를 풀고 또 풀어야만 국가 소멸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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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도 “어렵다” 한 개혁과제들
압축성장이 만든 갈등 서사 내포
정권 바뀌어도 정책 지속 틀 필요
」
대한민국에 어쩌다 이런 난제가 산적하게 됐을까. ‘헬 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9년 전, 비슷한 의문을 품은 일군의 사회학자들은 그 원인 중 하나로 ‘압축성장’을 꼽았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큰 업적을 압축적으로 일궈낸 50여 년 사이, 그보다 더 복잡한 삶의 구성 원리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작금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1965년부터 2015년까지 50년간의 압축성장의 그늘에서 전개된 삶의 변화상을 『압축성장의 고고학』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유물과 유적 등 옛 삶의 흔적을 조사해 사회 모습을 복원하는 고고학처럼 과거 사회조사 데이터를 모아 압축성장 시기의 사회상을 살펴본 것이다.
차갑고 건조한 옛 통계수치는 빠르게 성장하면서 뒤틀려 가는 사회의 실상을 나이테처럼 품고 있었다. 결혼과 출산은 점점 여성의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됐고, 자녀의 수는 줄었으며, 고령화는 심화했고, 높은 교육열이 교육구조의 불평등을 만들었고, 고소득·고학력 계층은 끼리끼리 어울렸고, 계층이 낮을수록 더 큰 위험에 직면했으며, 정보의 격차는 더 커졌다. 연구의 좌장이었던 서울대 장덕진(사회학) 교수는 출간 인터뷰에서 “한국은 압축성장을 했기 때문에 성장할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한 대비는 전혀 안 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강의 기적 뒤에 감춰진 기저질환은 다음 세대에 함께 상속됐고, 역대 정부는 그 치료법을 찾는 개혁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지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더 키우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먼지 쌓인 갈등의 압축파일을 전혀 풀지 못하고 있어서다. 고고학자가 붓으로 유물의 먼지를 털어내듯 ‘갈등의 서사’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다뤄도 어려울 판에 ‘무대뽀 결단’과 ‘막무가내 반발’이 쉴 새 없이 충돌하고 있다. 분노의 힘으로 금메달을 땄다는 배드민턴 국가대표 안세영이 “저의 서사는 고비고비가 쉬운 게 없다”고 했던 것처럼, 또 다른 갈등의 당사자들은 ‘할말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이라며 가슴을 치고 있다.
그 결과, 야심 찬 의료개혁은 민족의 명절을 앞두고 군의관을 응급실에 투입하는 초유의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의대 증원은 여당 안에서도 새로운 갈등을 낳고, 전공의와 의대생의 복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간호사법 통과 뒤 간호조무사의 불만이 터져나오고, 병원과 응급실은 운영난에 빠졌다. 그런 가운데 의사협회장은 “추석 응급진료는 대통령실에 연락하시라”는 궤변을 편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한국 의료계의 수준이 이 정도였나 싶다.
돌파구는 정치에 있다는 게 장 교수의 9년 전 진단이다. 당시 인터뷰에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있는 해법이 정치적인 이유들 때문에 실행이 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이 장기간 지속할 수 있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유효한 해법이지만,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압축파일을 풀어야 할 여야 대표가 만나자마자 갈등의 서사만 추가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김승현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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