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홍의 시선] 똑같이 낡은 지겨운 진영 정치

정재홍 2024. 9. 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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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지난달 29일 CNN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신의 흑인 정체성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한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똑같이 낡은 지겨운 각본(same old tired playbook)”이라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달라”고 대답했다. 이에 진행자는 “그게 다냐”고 물었고, 해리스는 “그게 다다”고 말했다. 앞서 트럼프는 해리스가 인도계 미국인으로 행세하다가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최근 흑인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 낡은 정치 멀리한 해리스 지지율
음모론 내세운 트럼프 앞질러
식상한 주장은 국민 지지 못 받아

해리스 부통령은 현지시각 8월 29일 대통령 선거 출마 이후 CNN과 가진 첫 언론 심층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종 정체성 공격에 대한 질문에 ″다음 질문이요″라고 답하며 일축했다. AP=연합뉴스

해리스가 트럼프의 근거 없는 주장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은 데 대해 미국 언론은 잘 대응했다고 평가했다. 해리스가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너무나 분명해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상대방의 정체성과 관련해 음모론을 퍼뜨리며 공격해 왔다. 트럼프는 2008년 대선 때는 케냐 태생의 흑인 아버지를 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해 ‘미국 태생이 아니기 때문에 헌법상 대선 출마가 불가능하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오바마가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공개해도 “조작됐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해리스는 CNN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인종·성별을 부각하지 않았다. 해리스는 ‘당선되면 여성이자 흑인 여성 최초로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인종·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을 위해 대통령직을 맡을 최적임자라고 생각하기에 출마한 것”이라고 말했다.

해리스의 이런 전략은 2016년 대선 때 트럼프에게 패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과 기득권 정치에 대한 반감이 클린턴의 낙선으로 이어졌다. 클린턴은 대선 유세에서 “가장 높은 유리 천장을 깨뜨리겠다”며 여성 정체성을 강조했다. 반면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대선 유세에서 인종과 관련한 언급을 최소화하며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백악관에서 TV 생중계를 통해 대통령 후보직 사퇴 배경을 설명하고 아들 헌터 바이든과 포옹하고 있다. 그는 이날 카멀라 해리스 지지 의사를 재 표명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7월 21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한 뒤 트럼프에 뒤지던 해리스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다. 로이터통신과 여론조사 기관 입소스가 지난달 29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해리스의 지지율은 45%로, 트럼프(41%)를 4%포인트 앞섰다. 이는 한 달 전 같은 기관 여론조사에서 해리스가 트럼프에 1%포인트 앞선 것과 비교하면 격차를 더 확대한 것이다.

해리스의 인기는 바이든과 트럼프라는 고령의 비호감 대결이던 미 대선에 참신한 인물이 가세한 데다 트럼프 당선 가능성에 위협을 느낀 민주당 지지자들이 결집했기 때문이다. 해리스는 지난 22일 민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우린 뒤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식의 인신공격·음모론 등 분열적·퇴행적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해리스의 대선 가도는 순항하고 있지만 트럼프와의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내여서 두 달 남은 대선에서 누가 당선될지는 미지수다. 민주당 지지층을 결집하면서 무당파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게 해리스의 과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을지 및 제36회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한국 정치에서도 낡고 식상한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국무회의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의 주장은 보수를 결집하려는 이념 공세로 여겨지며 국민 생각과 동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달 말 기준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29.6%(리얼미터)로, 2년 만에 다시 20%대로 떨어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반일 몰이 중이다. 이 대표는 서울 지하철 역사 등에 설치된 독도 조형물 철거와 관련해 ‘정부의 독도 지우기’라며 여론 공세를 펼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가 승객 동선에 지장이 없도록 리모델링하기 위한 절차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민주당은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 방류가 한국 해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킨다는 주장을 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근거가 없다는 게 판명 났다. 2008년 한미 FTA 반대를 위한 광우병 괴담과 2016년 사드 전자파 괴담도 모두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

진영 결집을 위해 낡은 이념 공세에 매달리는 정치는 국민 생존을 위협한다. 내수 부진에 따른 자영업 몰락, 서울 아파트 가격 급등, 미래 먹거리 불안 등 우리 사회를 흔드는 문제가 적지 않다. 이들 문제에는 진영·이념이 아닌 실용주의가 답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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