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경의 에듀 서치] 역사 교과서 전쟁, 정치권은 손떼고 학교현장 선택에 맡겨야
文정부 교과서, 그간의 ‘상식’ 무시
내년 일부 교과서 보수색 짙지만
불문율 지키며 첨예 논쟁 비켜가
정쟁·분열 따른 학생 피해 없도록
학교운영위 교과서 선정 지켜봐야
문재인정부가 ‘합격 도장’을 찍어 학교에 나눠준 고교생용 역사 교과서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역사 교과서에는 현 정부나 현직 대통령에 대한 설명은 최소화하고, 평가는 되도록 무미건조하게 한다는 불문율은 무시됐습니다. 교과서가 아니라 정권 홍보물 같다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2020년 학교 현장에 배포했던 책을 볼까요. 씨마스 출판사의 고교 한국사는 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악수 장면을 실었습니다. 가로 21㎝ 세로 28㎝ 크기로 두 정상의 사진이 페이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이회영 같은 위인도 받지 못한 파격 편집이었습니다. 비상교육도 문 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 위원장과 걸으며 무언가 설명하는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회복시킨 ‘리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망쳐놓은 ‘빌런’으로 그렸습니다. “고조되던 한반도의 긴장은 2018년 문재인정부의 노력으로 큰 전환점을 맞았다.”(씨마스) “문재인정부가 들어서며 남북관계는 전환점을 맞았다. 문재인정부가 제시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화해 협력 방안에 북한이 호응.”(동아출판) 일부 교과서는 문 전 대통령의 소득주도성장을 추켜세우기도 했습니다.
박근혜정부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할 때 “현직 대통령이 자기 아버지 제사상에 올리려고 만든 교과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는 교과서를 이렇게 만들어놨습니다. 박정희는 안 되는데 문재인은 된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년 3월 새 학기부터 쓰일 새 교과서가 지난 30일 공개됐습니다. 야권으로부터 ‘타깃’이 된 교과서가 있습니다. 한국학력평가원이란 곳에서 펴낸 고교생용 한국사 교과서입니다. 교과서 시장에 처음 문을 두드린 출판사죠.
집필진이 보수 성향으로 알려졌지만 윤석열정부를 칭찬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이후를 다루는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정착’ 단락에서 “문재인정부는 적폐청산을 강조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추구하였고, 공정과 상식을 강조한 윤석열정부로 다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고만 기술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윤 대통령까지 삽화를 나열하고 각 정부의 슬로건을 말풍선으로 표현한 부분을 보면, 문 전 대통령의 말풍선에는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 윤 대통령 말풍선은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 사는 국민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최근 정부에 대한 서술을 최소화하는 ‘상식’으로 돌아온 것이죠.
만약 이 교과서가 이렇게 쓰였으면 어땠을까요.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핵 위협을 이어갔지만 문재인정부는 별다른 대응을 못 했다.” “윤석열정부가 들어서며 남북관계는 전환점을 맞았다. ‘힘을 통한 평화’란 원칙 속에 한·미동맹을 강화해 대등한 남북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미래세대가 배울 역사 교과서에서 최고 권력자를 칭찬하는 일은 독재국가에서나 벌어지는 일입니다. 야권에서는 ‘독재 시대로 돌아갔다’는 논평을 내놨을 겁니다.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가 보수적 역사관을 담았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균형을 잃고 완전히 오른쪽으로 갔다고도 보긴 어렵습니다. 건국절 논쟁을 피했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이 교과서를 포함해 9종의 새 한국사 교과서 모두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보수 역사학계는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해왔죠.
이 논쟁은 진행형이고 여전히 첨예합니다. 보수 진영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민, 국토가 회복된 날이므로 이날을 실질적 건국 시점으로 봅니다. 이는 ‘건국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재조명하자는 주장으로도 이어집니다. 진보 진영은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부정한다고 봅니다. ‘친일’ 프레임을 씌워 공격하는 소재입니다. 보수 정부가 새 교과서에서 ‘정부 수립’으로 정리한 것은 건국절 논쟁에서 한 발 뺀 것입니다. 진영 내부의 비판을 무릅쓰고 확전을 자제했다고 봅니다.
홍범도 장군을 폄훼하지도 않았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를 상세히 다루면서 2021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관련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실었죠. 이승만정부 업적이 다른 교과서보다 강조된 측면은 있습니다. 다만 “친일파 처벌보다 반공을 우선시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과오도 성의 있게 기술했습니다. 다만 ‘독재’란 말을 빼고 ‘집권 연장’이란 표현을 쓴 점은 거슬린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야당은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교사 등을 동원해 이 교과서를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독재나 친일 코드를 찾으려고 ‘현미경 검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노력이 성공하면 또다시 ‘역사 전쟁’이 터질 것입니다. 보수 진영은 ‘대한민국 수립’으로 다시 쓰도록 정부를 압박하며 역공을 취할 거로 예상됩니다.
생산적 결과물 없이 갈등과 분열의 골만 더 깊게 팠던 ‘역사 전쟁의 역사’를 두 진영 모두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교육 현안이 내팽개쳐지면서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도 수십 년 반복된 교과서 논쟁의 교훈이란 점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과서들은 이제 학교 현장의 선택을 받게 됩니다. 학교 관리자와 교사 그리고 학부모가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과서를 선정하는 절차에 들어갑니다. 역사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 속에 이뤄집니다. 요즘 교과서는 수업에서 쓰이는 여러 교재 중 하나일 뿐입니다. 교과서에 담긴 편향적 해석이나 용어는 교실에서 교차 검증됩니다.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 선정 작업을 차분히 진행하도록 지켜봤으면 합니다. 이번만큼은 역사 교과서를 정권의 ‘전리품’이나 정권 투쟁의 수단쯤으로 여겨온 정치권에선 손을 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5층서 킥보드 던진 초등생…‘처벌 불가’ 이유는?
- 다리에 불 붙이고 ‘휙’… 고양이 21마리 죽인 20대
- ‘상습 마약 투약’ 유아인, 법정구속…“의존도 심각”
- ‘전기차 화재’ 그후…“집 왔는데 피부 발진” 주민 고통
- 배우 한소희 친모 구속…“불법도박장 12곳 운영 혐의”
- ‘열·경련’ 2세 여아, 응급실 11곳 진료거부…“의식불명”
- “그 MBTI 채용 안 한대” 성격 검사 ‘신뢰성 논란’
- 지하철역 냉장고 속 음료 마신 직원들 구토…‘락스’였다
- “10월 1일 쉰다”…‘국군의날 임시공휴일’ 국무회의 의결
- 잔멸치 속에서 ‘새끼 복어’ 발견… 당국 “섭취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