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까맣게 그을린 두 얼굴

2024. 9. 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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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처서가 지나고 구월에 접어드니 이제 아침과 저녁에는 좀 선선해진 느낌이 든다. 더위가 한풀 꺾였나 싶다. 올해 처서에는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았다. 처서 때가 되니 내가 쓴 졸시 ‘처서’가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며 서로 안부를 물었다. 시 ‘처서’는 내 등단작이다. 이 시로 1994년에 시인이 되었다. 벌써 서른 해가 지났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라고 쓴 시행이 들어있는데, 시골 고향집에 머무르며 그 당시에 가을을 맞은 때의 소회를 적은 시였다. 서른 해 전에 비하면 올해 여름은 너무 길고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일 텐데, 그래도 구월이 되니 여름의 끝인 듯하고 계절이 드디어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이웃은 함께 살며 행복 돕는 이
타인 삶 무심히 여긴 건 아닌지
공감하지 못했다는 반성하게 돼

김지윤 기자

내가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 마을에서는 요즘 풀을 깎는 일이 한창이다. 예초기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명절을 앞두고 있어 벌초를 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귤밭 등에서 여름 내내 막 자란 풀을 베야 할 때가 지금 이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풀을 깎으려고 밭으로 나갔는데 바로 옆밭에서도 동네 아저씨가 풀을 깎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땡볕 아래에서 일하는 것을 멀찌감치서 자주 보았다. 풀을 깎다 아저씨와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냉수를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시골살이 세 해째인 나를 위해 아저씨는 예초기 사용법이나 묘목을 관리하는 법 등에 대해 조언을 해주셨다. 밭이 붙어 있어 일하러 밭에 나와 있을 때마다 아저씨는 오래 농사일을 하면서 쌓은 경험을 내게 자상하게 들려주시곤 했다.

해가 질 무렵에 예초기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다 옆집 사람을 만났다. 옆집 사람은 나를 보고선 “모자 좀 벗어봐요. 얼굴 좀 보게요. 얼굴이 까매졌는데 모자까지 쓰고 있으니 얼굴이 보이지 않네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모자를 벗고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저만 까맣게 탄 게 아니네요. 가끔 지나가다 보면 일을 너무 많이 하시던데,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라고 말했다. 옆집 사람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한 차례 더 함께 웃었다. 옆집 사람도 나도 여름날을 사는 동안 얼굴이 숯처럼 까맣게 되었으니 그만큼 바깥에서 여름을 열심히 살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날 만났던 두 분의 동네 사람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끔씩 내 일상의 시간을 함께 나눠온 사람들이요, 나의 행복을 돕는 사람들이요, 여름의 날들을 땀 흘리며 각자 부지런히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삶을, 그리고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여기며 지내온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햇살에 검게 그을린, 두 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때마침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떤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또 다른 사람을 어떤 태도로 상대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두 편의 글을 접했다. 첫 번째 글로는 올해 입적한 지학 스님을 추모하는 문장이었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스님은 사람을 대할 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차별하지 않으셨는데 가난한 노보살이 스님의 방을 찾더라도 문을 활짝 열고 맞이하셨고, 저명인사가 찾아오더라도 촌로(村老)와의 대화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불자들은 아버지의 등에 기댄 것과 같은 든든함을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지학 스님을 뵌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스님의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짐작하게 했고, 또 나를 점검하게도 했다.

두 번째 글로는 부산 대운사 주지인 주석 스님이 최근에 펴낸 책 ‘그대가 오늘의 중심입니다’에 실린 것이었다. ‘돌’이라는 제목을 붙인 짧은 글이었다. “매화 옆의 돌은 오래되어야 하고 대나무 옆의 돌은 메말라야 하고 화분 속의 돌은 교묘해야 하고 강가의 돌은 둥글어야 하고 난초 옆의 돌은 졸박(拙朴) 해야 한다. 나는 오늘 무엇 옆의 돌로 남을 것인가.” 이 글에서도 개개의 돌은 맞춤의 자리가 있다는 것과 그 처처(處處)의 자리는 고유한 것이니 우열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요 며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말을 늘어놓은 적은 드물었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크게 공감하고 또 곁에서 극진하게 도와주는 일은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성원하는 일은 해도 해도 부족함이 있을 테지만.

계절이 바뀌는 이즈음의 시간을 살면서는 올해 여름을 열성적으로 살아온,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까매진 얼굴을 뭉클하게 바라보게 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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