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소리 듣던 부잣집 자제들, 가시밭길 걸은 이유 [박만순의 기억전쟁2]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아가. 이제 외지 손님들 상을 준비하거라."
"예. 아버님"
마을 주민 약 200명이 먹고 간 자리는 정신이 없었다. 집안사람과 마을 여성들이 총동원돼 상을 부엌으로 나르고 설거지를 했다. 치우는 데에만 1시간 넘게 걸렸다. 하지만 새로운 손님 누구도 투덜대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이 배 두드리며 일어난 자리에 음식을 모두 치웠다. 멍석 위에 외지 손님들을 위한 새로운 음식상이 차려졌다. "아이구. 이렇게 귀한 음식을..." 손님들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얀 쌀밥에 소고깃국이 침을 꿀꺽 삼키게 했다. 돼지고기, 닭고기, 고사리, 도라지무침, 두부전, 약과 등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잔치상을 받은 이들은 황송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서들 드시게"라는 집주인 이주승의 말에 손님들이 숟가락을 들었다. 멍석 위에서 허겁지겁 밥을 먹는 외지 손님들은 다름 아닌 걸인(乞人)이었다.
1년에 두 번 걸인 초대한 이구영 집안
그것도 인근 지방에서 이주승 생일잔치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온 걸인까지 와서 400명이나 됐다. 보통 잔칫집에는 거지들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주손님이 먹다 남긴 음식을 개다리소반에 차려주기 마련. 그런데 제천군(현재 충북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의 이구영 집에서는 손님에 따른 음식상의 구별이 없었다.
이주승 집에서는 1년에 두 번 큰 잔치를 벌였다. 봄에는 이주승의 생일잔치, 가을에는 이주승 어머니의 생신 잔치였다. 손님은 마을 주민 200명과 걸인 400명 총 600명이었다. 찾아온 거지를 대접하는 게 아니라 1년에 두 번 공식적으로 거지들을 초대한 것이다. 전대미문의 잔치라 할 수 있다.
이주승은 구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해 이강년 의병장의 문관을 지냈었다. 의병운동의 참가자 중 양반 출신들은 고루한 봉건의식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상민과 머슴 출신의 의병들을 하대했다. 이는 의병운동의 전선에 균열이 생기는 주요 요인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양반 집안 출신인 이주승은 걸인들에게 단 한 번도 하대하지 않았다. 항상 경어를 쓰며,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한 이유에는 의병운동을 하다가 집안이 풍비박산이 돼 걸인이 된 동지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분이며, 그의 타고난 천성이 큰 이유였다. 즉 더불어 사는 사회, 대동세상을 꿈꾼 그의 심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주승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였다. 1년에 두 번씩 잔칫상을 받은 걸인들은 정성을 모았다. 그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비석을 만들어왔다. 또한 연초 아홉 봉과 조화 두 개, 장례식 때 쓰는 대형 깃발 한 개를 부조했다.
걸인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마당에 엎드렸다. 그러자 상주 이주승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왜들 이러시오!" 하며, 자신도 멍석 위에 꿇어앉아 문상을 받았다. 1932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걸인들이 가져온 대형 깃발은 후일 이주승의 아들 이구영이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2001).
수해 때 소작료 받지 않은 최문용 집안
병술년(丙戌年, 1946년) 수해 때 충주군(현재 충북 충주시) 살미면은 말 그대로 물바다가 됐다. 지주는 그들 나름대로 가을의 도지(賭地, 일정한 대가를 주고 빌려 쓰는 논밭이나 집터)가 줄어들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 농작물이 쓸려나가자 당장 그해 가을부터 굶을 걱정이 태산이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미군정이 실시한 식량정책은 실패했고, 식량가격의 폭등에 따라 19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추수봉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른바 '10월 항쟁'이었다.
그해 가을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 가난을 해결해 준 이가 있었다. 오천석 지기 최영봉은 그해 가을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 앉아서 굶어 죽을 생각에 좌절했던 소작인들에게 빛이 보인 것. 심지어 최영봉은 전해에 걷어 들여 창고에 쟁여놓은 쌀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줬다.
장맛비에 쓸려간 꿈을 소작인들의 가슴에 다시 안겨준 최영봉은 당시 독립촉성국민회 지역 간부였다. 정치 성향은 보수우익이었지만 나눔과 베품의 철학을 아는 이였다. 살미면 무릉리 출신의 사회주의자 최문용은 최영봉의 아들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 '6.25를 전후한 월악산 지역의 소요', 2008).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제천 한수면과 충주 살미면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 이주승과 최영봉 집안의 '나눔 철학'은 그 대(代)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아들인 이구영과 최문용이 더불어 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회주의자가 되는 데 일정하게 작용한 것이다.
해방 직후 이구영과 최문용이 서울에서 활동할 때였다. 조선공산당에 몸담았던 이구영은 1946년 전국을 순회하며 찬조연설자로 정치연설을 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무상몰수에 의한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구영의 강연은 주로 학교 교실에서 이뤄졌다. 교실 칠판에 그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고 썼다. 즉 농사를 짓는 사람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소작을 금지하는 것이다.
연설이 끝난 후 참석자들, 특히 농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이구영과 최문용의 선대(先代)가 일시적으로 베품과 구제 활동을 했다면, 그의 아들들은 제도와 이념으로 나눔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 서울에 올라가기 전, 이구영이 상투틀고 찍은 사진. |
ⓒ 심지연 |
이구영은 어릴 때부터 "도련님" "서방님" 소리를 들으면서 컸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왜 아버지뻘, 할아버지뻘 되는 이들이 내게 극존칭을 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평생을 땀 흘려 일하는데 왜 항상 가난할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공부를 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으로부터도 책을 빌려 읽었다. 그렇게 책이 왔다 갔다 하면서 '독서회 사건'이 터졌다. 이 일로 인해 이구영은 1944년 몇 달간의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본격적인 가시밭길이 시작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구영은 고향을 오가며 최문용, 송원균, 김기한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목표로 '월악동지회'를 결성했다. 이전까지 이구영과 최문용이 책 속에서만 독립과 혁명을 꿈꿨다면, 현실 속에서 자그마한 실천을 도모해보자는 것이 이 모임의 취지였다.
월악동지회는 월악산을 중심으로 해서 제천 덕산, 한수면과 충주 살미면 신당리, 공이동의 뜻있는 청년들이 모여 비밀모임을 결성한 것이다. 이들은 책을 읽고, 정치교양을 하며, 징병이나 징용을 기피한 청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고, 주변 청년들에게 일제에 반대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심지연, 위의 책).
배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선이 독립되면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이구영과 최문용의 생각은 해방 전후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로막혔다.
일제강점기 말에 최문용은 영등포로 달려갔다. 앞으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조직해, 그들의 의식을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운동에 몰두하던 최문용은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최문용은 명륜동에 굉장히 큰 집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집의 지하실에 변재철과 함께 단파 장치를 설치해 놓고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최문용이 협동단 사건으로 잡혔다. 이 일로 인해 영등포 일대에서 80여 명이 붙잡혔다. 일제강점기 말에 발생한 조직사건이었다.
해방 후에는 동지들에 의해 노동운동의 꿈이 좌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직운동의 명수로 알려진 김삼룡에 의해서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자 밀집 지역인 영등포를 직접 장악하겠다는 생각으로 김삼룡을 파견했다. 김삼룡은 기존 영등포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이들을 전국 각지로 분산시켰다. 이들의 빈 자리에 김삼룡이 직접 조직사업을 벌였다. 최문용은 노동운동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분개해 조선공산당을 탈당했다.
▲ 서울뉴스 조선공산당 경성시위원회 기관지 <서울뉴스>, 1946년경. |
ⓒ 심지연 |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이구영은 서울에서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3.8선을 넘어야 했다. 그 대열에 이구영도 함께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두 청년 이구영, 최문용이 남조선(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과 대한민국에서 배제됐다.
두 청년 중 한 명은 한국전쟁기에 한반도에서 영원히 거세됐다. 정부수립 이전 월북한 최문용과 변재철은 북한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법과대학을 다녔던 이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자 그들은 북한(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사법상 이승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즉 유엔군에 의해 서울에 이어 평양이 함락된 시기에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할 때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당에서 차가 배정됐다. 하지만 최문용과 변재철에게는 차가 배정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그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이라는 질문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꾸준히 '만약 ~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세워야 한다.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꿨던 두 청년 이구영과 최문용의 삶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미군정이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을 합법화했다면, 만약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에 의한 통일국가가 만들어졌다면, 좌우정당이 극단적인 투쟁을 벌이지 않고 민주주의 룰에 기초해서 선의의 정책경쟁을 벌였다면 한반도는 어땠을까. 즉 배제의 정치가 아닌 타협과 관용의 정치가 이뤄졌다면 어떠했을까?
두 청년이 그들의 고향을 버리고 북한행을 선택했을까? 두 청년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월악산 인근의 청년들이 빨치산의 길을 걸었을까? 보다 거시적으로 이야기하면 '민족 최대의 비극 한국전쟁이 일어났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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