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두 소녀의 졸업작품 완성기
[조영준 기자]
▲ 영화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01.
불교 경전에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왕이 시각장애인에게 코끼리를 만지게 하고 어떤 동물일지 맞춰보라는 문제를 낸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더 큰 동물 앞에서 시각장애인은 자신 앞에 놓인 일부만 만지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다리를 만지고는 기둥처럼 생긴 생명체를, 코를 만지고는 절굿공이 같은 동물을 말하는 식이다. 이 이야기는 전체를 바라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만으로 전부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편협함을 풍자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웃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곤 한다.
영화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를 연출한 김남석 감독은 이 경전의 이야기로부터 주제 의식을 영감받아 이 작품을 완성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대로 옮겨오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다. 경전의 내용이 가진 설정을 극 중 두 인물에게 부여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현실의 문제를 서로 돕고 화합하는 과정에서 해결하는 서사로 발전시켰다. 모티브가 되는 원전에서는 수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태를 꺼내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자기 작품 속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서사를 통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02.
"우현아, 누가 넘어뜨렸는지 못 봤다고 했지?"
영화는 유난스럽거나 복잡하지 않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의 차례였던 우현(손수현 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촬영팀의 카메라와 렌즈를 부수고 도망가면서 책임을 지게 됐다는 게 큰 틀이다. 친구 하얀(이영지 분)이 마침 촬영을 구경하러 오면서 힘이 되지만 상황이 쉽지만은 않다. 촬영을 위해 빌려온 기자재가 망가지면서 기물 파손에 대한 손해 배상은 물론, 재촬영을 위해 배우와 스태프를 다시 모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당장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낼 수 있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것조차 녹록하지는 않다. 시각장애인인 우현과 청각장애인인 하얀에게는 남들과 다른 어려움이 있다.
▲ 영화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우현의 곁에 하얀이라는 인물을 두는 건 혼자서는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로 그칠 수 있는 상황을 협력을 통해 함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초반에는 두 사람이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감독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각자의 추리를 이어가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우현이 녹음 파일 속에서 범인의 찰랑거리는 쇳소리를 찾아내고, 하얀이 카메라 사이에서 긴 생머리 한 올을 발견하는 식이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함께하기보다 각자의 방식으로 주변을 수소문한다.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정확히 마주 봐야 하는 상황에서 각자가 발견할 수 있는 지점만 들여다보는 것이다. 바로 곁으로 범인이 지나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에 해당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두 사람은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현이 볼 수 없는 지점을 하얀이 대신 봐주고, 하얀이 들을 수 없는 대상을 우현이 대신 들어주면서 온전한 하나가 되는 방식이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간직하고 있던 문제는 이로써 모두 해결된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둘 사이의 유격은 분명 있었지만) 서로를 챙기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04.
"아까 내가 아프다고 얘기했던 거 미안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한마디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선배 나영(이예진 분)의 목소리에 있다. 아직 범인이 잡히기도 전,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녀의 말에는 이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정확한 의도가 놓여 있다. 장애인이 자유롭게 사회에서 모든 이와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감독의 바람이다. 영화는 장애인이 장애인을 끌어안는, 단순히 같은 상황에 놓인 이들끼리만 연대하는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는다.
▲ 영화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극의 이야기 위에서도 여러 지점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영화의 바깥 부분에 있다. 장애인의 영화 접근권과 배리어 프리 영화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이 작품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장애인 및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느낄 수 있는 물리적, 심리적 벽을 제거하자는 운동 및 정책 - 기자 말) 영화로 준비 및 촬영, 최종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영화 내용의 이해가 어려운 유아와 시청각 장애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음성으로 화면을 설명해 주는 '화면해설'과 대사 및 음악, 소리 정보를 알려주는 '자막'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내레이션의 경우에는 주인공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말하고 있음이 확인되는데, 이에 대해 김남석 감독은 지난해 7월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에서 자신이 장애인이 아니어서 그들의 입장을 온전히 대변하거나 설명할 수 없어 이 같은 형식을 빌렸다고 설명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영화 전체가 얼마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졌는지 알 수 있다. 극의 내러티브가 영화의 의도를 위해 이렇게 정확하게 활용된 사례를 이전에 또 본 일이 있을까. 카메라를 망가뜨린 범인을 찾는 일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장애인이 얼마나 자유롭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다.
우리는 코끼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만, 어쩌면 아직 코끼리의 다리만 쳐다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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