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학창시절, 내 영화에선 다르기를"... 이 감독의 선택
[김성호 기자]
영화제마다 주목하는 감독이 있다. 박찬욱과 봉준호는 칸영화제에서, 홍상수는 베를린영화제, 김기덕은 베니스영화제에서 유독 많은 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반은 농으로, 또 반은 관심과 애정을 보태어서 '깐느 박'이니 '베를린이 사랑한 홍상수'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는 하는 것이다.
그보단 못하대도 한국의 소소한 영화제라고 아끼는 누구가 없을 리 없다. 올해로 26회째를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또한 마찬가지. '여성 영화를 통한 영화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하는 최고의 국제영화제'라고 자평하는 이 영화제는 지난 수십 년 간 많은 여성 영화인을 발굴해 그 면면을 알려왔던 것이다.
▲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는 '지금 여기, 한국영화 단편선 1'에 묶여 두 차례 상영기회를 얻었다. 29분, 결코 짧지만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여중생 한슬(홍정민 분)의 만만찮은 학급 적응기를 그린다. 앞서 언급한 대상 수상작 <성적표의 김민영>이 고등학교 졸업 뒤 갈라진 단짝친구들의 미묘한 관계의 변화에 주목했다면, 이번 작품은 그 나이대를 앞당기고 유대가 형성되기 전의 상황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영화는 저마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막을 올린다. 처음엔 음악수업 실기평가인가 싶던 그 장면이 실은 벌칙이었음이 이내 드러난다. 준비물을 안 가져오거나 수업에 집중 않고 떠든다거나 하면 교사가 학생을 불러내어 노래를 시키는 것이다. 그 또래 웃음 헤픈 아이들이 자지러지듯 폭소를 터뜨리는 가운데, 유달리 굳어 있는 아이가 꼭 한 명 있다. 다름 아닌 한슬이다.
외향적인 아이들이야 노래 한 곡 뽑는 것이 어렵지 않을 수가 있겠다. 어쩌면 누구는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즐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성적인 아이라면 그 순간이 까무라칠 만큼 싫을 수도 있는 노릇. 한슬이 꼭 그러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음악시간을 긴장해 보내는 것이다.
▲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외할머니와 한슬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감독은 단 한 장면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한슬이 한창 게임에 열중하던 순간, 밥을 먹으라며 외할머니가 방문을 덜컥 여는 장면이다. 화들짝 놀란 한슬이 게임을 하던 화면을 인터넷 강의 아래 감추어 놓지만 열린 문 뒤로 외할머니는 보이지가 않는다. 밥 먹으라 문만 열고는 곧장 식탁으로 돌아간 것이다. 말하자면 외할머니는 한슬이 무얼 하는지,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별 관심이 없다.
영화 속 외할머니가 나쁜 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저 전형적인 한국 사회의 할머니상과는 어딘지 거리감이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 영화가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외할머니를 연기한 배우 정애화가 남긴 말은 기억할 만하다. "장편도 많이 찍었는데 이 작품에선 좀 긴장했다"고 말문을 연 그녀는 "묘한 느낌의 할머니인데 따뜻한 느낌인 보통 할머니 성향하고도 다르고 해서 긴장하고 NG도 많이 내고 했다"고 털어놨다.
▲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하다. 처음엔 다른 아이들로부터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던 한슬이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표정이 경직돼 있고 대화도 잘 이어지지 않는 것이 따돌림의 이유가 된다. 그렇다고 대단한 따돌림이 있는 건 아니라지만 어린 마음에 상처될 일들도 한둘이 아니다.
영화는 평범한 나날 가운데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주목한다. 한슬이 그토록 부담스러워하던 음악수업에서 벌칙에 걸리게 되고, 그로부터 노래를 한 곡 뽑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준비물인 리코더를 집에다 두고 가져가지 않아서라는데, 그 별것 아닌 상황이 주는 부담과 이를 극복해내는 상황이 빚어내는 영화적 재미가 보는 이의 마음을 은근히 붙든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상영 뒤 감독은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를 제작하게 된 과정에 대해 풀어냈다. 임 감독은 "10대 시절이 왜 싫었을까를 떠올려보는 시간이 있었다"면서 "주인공만큼은 (싫었던 10대 시절을) 풀어내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 연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상당 부분이 자전적 이야기로 꾸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답변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구체적이며 섬세한 감각과 묘사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 특별하거나 대단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임 감독의 시선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또 이 시대 여성관객들에게 유달리 호응을 일으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앞서 선보인 장편 <성적표의 김민영>이나 단편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모두 자라나는, 또 이미 성숙한 여성들의 현실적 성장과 성숙, 관계맺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유독 여성 관객들은 이 작품들에 대해 공감되는 대목이 많다고 말한다.
그 설정과 캐릭터, 드라마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나와 같은 이에겐 도리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임지선 감독의 영화를 접할 일이 있으리라고, 그녀의 이름 석자를 가만히 되짚어보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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