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은 복사기 살 돈도 없는데... 디지털 교과서 때문에 칠판 다 뜯어내
[서부원 기자]
▲ 올해도 복사기 마련은 물 건너간 듯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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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프린터는 기본일 뿐, 스캐너 기능이 추가된 복사기가 필요하다. 요즘엔 상급 관청에 보고용 공문을 보낼 때도 스캔 파일(PDF)을 첨부하는 게 보통이다. 수업 자료를 아이들 숫자만큼 인쇄하는 일은 많이 줄어든 대신, 교사의 업무도 스캔 파일을 주고받는 일이 태반이다.
그때마다 다른 교무실을 찾아간다. 그래선지 그곳의 복사기도 과부하가 걸려 고장이 잦고, 멈출 새가 없다 보니 주변에 열기가 돈다. 마치 죄인인 양 노크도 없이 슬그머니 들어갈 정도로 눈치가 보인다. 인쇄할 분량이 많은 경우엔 최소한 용지라도 챙겨 들어가야 덜 미안하다.
올 초부터 사달라며 떼를 썼다. 복사기가 없어 업무에 지장이 적지 않다며 회의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한결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예산이 부족하고, 가용 예산을 집행하는 데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 곧, 교무실 복사기보다 더 시급한 게 많다는 뜻이다.
부러 예산 목록을 들여다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몇십만 원 단위로 잘게 쪼개져 있는 용처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시급하지 않은 게 없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복사기를 사려면 그 예산 항목을 지우고 몽땅 가져와야 한다. 타 부서의 양해 없이는 힘든 일이다.
올해도 복사기 마련은 물 건너간 듯싶다. 올 연말 부서별 예산을 요구할 때 목록의 맨 윗자리에 적어넣겠지만, 또다시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될까 두렵다. 듣자니까, 전임자가 작년에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고 하니, 부서 내부에 소외감마저 팽배해있다. 여하튼 한 푼의 예산이 아쉽다.
그러던 차에 조만간 고1 교실 전체의 칠판을 교체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미 교육청으로부터 학교마다 막대한 예산이 배정됐다고 한다. 방학 등 수업에 지장이 없는 기간에 공사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늦어도 내년 새 학기 시작 전엔 끝마쳐야 한단다.
멀쩡한 기자재까지 철거... 이게 혁신일까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는 정부 방침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양새다. 올해는 고1 교실이 대상이고, 디지털 교과서가 전면 도입되는 내후년까지 모든 교실의 칠판 교체 공사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곧, 터치스크린 기능이 있는 액정 화면이 기존의 칠판을 대체하게 될 모양이다.
되짚어 보면, 지난해 일선 교육청에서 관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태블릿피시와 노트북을 일괄 지급한 건, 디지털 교과서 도입을 위한 선행 작업이었다. 아이들 손엔 스마트 기기가 쥐여있고, 교실마다 인터넷 무선 공유기가 설치되어 있으니, 이번 칠판 교체 공사는 사업의 마침표인 셈이다.
문제는 교실 내 설치된 멀쩡한 빔프로젝터와 내장형 화이트보드를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개 설치한 지 불과 3년 남짓 된 새것과 다름없는 장비다. 당장은 교내 특별실 등 공용 교실의 오래된 걸 교체해 활용될 순 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지하 창고에 처박힐 처지다.
전자 제품 특성상 창고에 들어가는 순간 얼마 못 가 망가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학교 밖으로 반출해선 안 된다. 공공 기자재의 경우, 임의로 외부에 반출했다간 처벌을 피할 수 없다. 하긴 새로운 교육 정책이 도입될 때마다, 멀쩡한 기자재들이 마구 버려지는 건 익숙한 풍경이다.
지금도 지하 창고에는 스마트 교탁, 사운드바, 웹캠, 전자 칠판 부품 등 과거 정부 때 사용되었다가 버려진 기자재가 천덕꾸러기처럼 보관되어 있다. 정책이 바뀌면서 쓸모가 없어진 것들이다. 보관 연한은 지났지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많다.
▲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면, 수업의 질이 높아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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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하건대, 교실의 첨단 기자재 보유 여부가 교육의 질을 담보하진 못한다. 이는 몇 해 전 독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부러 학교를 찾아다니면서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다. 세계적인 기술 대국이라는 독일에서 학교의 교실 환경은 우리와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소박했다.
성급한 일반화일진 모르나, 교실엔 딱히 기자재랄 게 없었다. 그 흔한 전자 칠판과 빔프로젝터는커녕 붙박이 칠판조차 없는 곳이 흔했다. 아이들로 북적이는 도서관에도 출입 및 도서 검색 등을 위한 시설은 드물고, 편히 기대어 책을 읽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독일의 학교는 '아날로그적'이었다.
그렇다고 독일 교육의 수준이 우리보다 낮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와 교육 목표와 방향이 사뭇 달라서 기자재가 필요 없는 거라고 핑계 대기엔 적이 민망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독일 교육이 '소프트웨어'에 치중하는 반면, 우리는 오로지 '하드웨어'에만 목매다는 형국이다.
이번 칠판 교체는 학교마다 수천만 원이 동시에 투입되는 공사라고 한다. 내년과 내후년에도 전국의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계속될 일이고 보면, 천문학적 예산이 소요되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동료 교사들은 정부가 밀어붙이는 일이라 막긴 힘들다면서도, 몇 해 전 학교마다 수천만 원을 쏟아부어 모든 교실에 설치한 빔프로젝터 신세가 될 게 뻔하다고 입을 모은다.
개인적으로는, 학교마다 막대한 예산이 배정됐다는 소식에 참 서글프고 우울했다. 학교에선 교무실에 복사기 한 대 마련할 돈이 없어 1년 내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교육부에선 디지털 교과서용 칠판으로 교체한다며 거침없이 수천만 원을 내려보내는 현실이 절망스럽다. 예산이 교육부 장관의 호주머니 쌈짓돈인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과문한 탓인지, 동료 교사 중에 디지털 교과서 도입이 교육적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사업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못 봤다. 되레 학습 분위기를 산만하게 할뿐더러 교실 수업 자체를 형해화할 수 있다며 우려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교육부 장관이 특정 '에듀테크' 기업의 영업사원을 자처하고, 대기업 재고 정리를 도와주는 거라는 억측마저 난무하고 있다.
오늘도 종이 서류를 들고 스캔하러 옆 교무실을 찾아간다.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다 문득 자문해 보게 된다. 쏟아지는 공문에다 온갖 잡무는 예전 방식 그대로인데, 교과서만 디지털로 바꾼다고 해서 과연 학교가 달라질까. 칠판 교체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막무가내 교육부를 향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면, 수업의 질이 높아지고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행복해집니까? 이게 최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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