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가 전부인 세상, 남쪽 끄트머리 '검은 산' '붉은 섬' 이야기

복건우 2024. 9. 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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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흑산도·홍도 여행... 자산어보부터 생홍어까지, 관광객들의 '자발적 유배지'

[복건우, 소중한 기자]

 주한 파푸아뉴기니 대사관 관계자가 지난 8월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있는 철새박물관에서 전시물을 보고 있다.
ⓒ 소중한
서울에서 350km 떨어진 '검은 산'의 이야기는 200년 전 그곳으로 유배를 떠난 '손암 선생'의 붓끝에서 나왔다.

목포여객선터미널(전남 목포시 항동)에서 서쪽 뱃길로 2시간 거리의 섬이었다. 바다 위로 넓게 열린 검은 봉우리들이 짙푸른 상록수 숲을 품고 있었다. 바다 뒤로 멀어지는 어선들은 물길을 따라 조업을 나가고 있었다. 거세다던 파도는 높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서둘러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남 끄트머리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흑산도 토박이' 이영일 선생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을 맞았다. 그의 10대조 할아버지는 300년 전 흑산도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국내 최초 어류 생태도감) 저술을 도왔던 '흑산도 어부' 장창대가 그의 진외가(陳外家, 아버지의 외가) 선조였다. 여행 이틀간 문화해설사로 나선 이 선생은 "<자산어보> 전문가"라는 자부심으로 나고 자란 섬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지난 8월 16일 흑산도에서 바라본 홍도(뒤쪽)와 장도(앞쪽).
ⓒ 소중한
흑산도(黑山島). 검은 산과 바다로 이루어진 19.7㎢의 작은 섬. 한반도로 날아드는 철새들의 정거장이자, 서해에서 잡아 올린 생(生)홍어의 본고장. 조선 후기에는 유배인들의 귀양지로 불리었고, 21세기에는 섬 관광객들이 자처하는 '자발적 유배지'가 되었다. 200년 전 이곳에서 15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정약전은 삶의 막바지까지 바다 동식물의 연원을 좇았다. <자산어보>는 흑산도가 품고 살아온 존재들의 모음집이었다.

최근 신안군이 태평양 섬나라들과 회의(세계섬문화다양성포럼)를 갖고 모임(태평양기후위기대응협의회)을 결성한 뒤로 흑산도는 세계인들을 위한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 'K-관광섬 육성 사업'에 흑산도가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 초대받은 주한 파푸아뉴기니 부대사와 말레이시아 대사도 그 '글로벌 교역'의 일환이었다. 선착장에 정박한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출발하자, 세계인들이 함께 탄 버스도 흑산도 도로를 질주했다. 훅훅 지나치는 박물관과 식당과 마을이 수백 년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락지에 새겨진 남북 이야기
 지난 8월 16일 찾은 전남 신안군 흑산도.
ⓒ 소중한
"흰 배에 줄무늬를 가진 사나운 새."

17년 전 우이도(전남 신안 도초면)에서 발견된 '흰배줄무늬수리'가 흑산도 철새박물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국내 유일 표본(박제본)"이라는 해설사의 설명이 눈앞의 새처럼 사람들의 귀에 박제됐다.

"덩치는 크고 무섭게 생겼지만 어린 새랍니다. 우리나라에 오는 새가 아닌데 왜 우이도에서 발견됐을까요. 조사를 해보니 무리에서 떨어져 먹이를 잘못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국내 조류 600종 가운데 400종이 흑산도를 거쳐간다.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조류 25종도 흑산도에서 관찰된다. 천연기념물 흰꼬리수리뿐 아니라 뿔쇠오리·섬개개비·칼새 등 멸종위기종도 있다. 철새박물관은 박제된 과거의 흔적이 아닌 살아있는 자연을 대리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새 한 마리에서 비롯돼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난 8월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있는 철새박물관.
ⓒ 소중한
"이 가락지 하나로 아빠와 아들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 철새박물관 해설사

60년 전이었다. 북한의 한 농부가 금속 가락지를 달고 죽은 새를 밭에서 발견했다. 북한 조류연구소 노학자 원홍구에게 보내진 새 발목에 새겨진 코드는 '農林省(농림성) JAPAN(일본) C7655'. 일본의 조류 인식 가락지를 찬 '북방쇠찌르레기'였다. 한강 이북에서 번식하는 새가 일본에서 발견될 리 없다며 노학자는 일본에 편지를 부쳤다.

일본(도쿄 야마시나조류연구소)은 답신에서 '남한이 일본의 가락지를 받아 사용한 것'이라며 놀라운 사실 하나를 같이 전했다. '쇠찌르레기에 가락지를 채운 건 남한의 조류학자 원병오 교수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된 북한 노학자 원홍구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쇠찌르레기를 매개로 서로의 생사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조선 후기 문신 정약전이 유배된 흑산도에 머무르며 1814년 저술한 실학서 <자산어보>(玆山魚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못다 한 이야기가 이어져 사리마을(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닿았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자 조선 후기 실학자인 손암 정약전이 15년간 머무른 오지 마을이었다. 한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1801년(신유박해) 유배 온 이곳에서 정약전은 흑산도 앞바다 물고기들을 연구했다.
실사구시의 학문 정신이 바다 생물 226종에 대한 기록으로 쌓였다.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데만 10여 년이 걸렸고(1814년 완성),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다시 100여 년이 흘렀다. 흑산도가 품고 사는 존재들의 생김새와 습성을 <자산어보>는 생생하게 포착해냈다.
 지난 8월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맛본 농어 구이.
ⓒ 소중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는 삭히지 않은 홍어를 쉽게 맛볼 수 있다. 지난 8월 16일 맛본 생홍어회.
ⓒ 소중한
200년 전 손암 선생이 쓴 책 내용이 200년 뒤 식탁 위로 불려 나왔다. '흑산시장 먹거리촌' 간판을 지나 보이는 첫 번째 식당이었다. 산처럼 쌓아 올린 농어 구이로 기름진 맛을 느끼고 나면 흑산도 할머니들이 직접 담근 눅진한 막걸리가 식탁마다 깔렸다. 주력 안주로는 삭히지 않은 홍어회가 담백하게 썰려 나왔다.

평소 홍어를 안 먹던 사람들이 홍어에 도전하는 사이 커다란 솥에는 해물라면이 팔팔 끓었다. 홍어와 민어와 푹 익은 김치를 '삼합'처럼 입안 가득 넣고 식당을 나가면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노을이 검은 산 뒤로 저물었다. 육지 어디에도 없는 맛과 풍경이 흑산도의 저녁을 이뤘다.

홍도 앞바다 기묘한 술집
 지난 8월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의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흑산도아가씨는 가수 이미자씨의 대표곡이다.
ⓒ 소중한
 지난 8월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 전경.
ⓒ 소중한
사람들을 가두고 고립시키던 섬은 음악과 문학의 근거지가 되었다.

흑산항을 조망하는 상라산전망대에서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내려다보였다.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이 단체 사진을 찍으며 가수 이미자가 1966년 발표한 '흑산도 아가씨'를 흥얼거렸다.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비바람이 조금만 강해지더라도 흑산도엔 배가 뜨지 않는다. 연평균 50일 가까이 여객선이 입도하지 못하는 섬의 외로움을 사람들은 노랫말로 짓고 따라 불렀다.

김훈 작가가 2011년 출간한 역사소설 <흑산>도 조선 후기 정약전이 흑산으로 유배를 떠나는 뱃길에서 시작됐다. 너비 92km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정약전은 죽을 때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갇혀 헤매던 삶들의 유배지는 실은 섬사람들의 생활지였다. 흑산도와 그 주변 유인도(영산도·장도·홍도)는 국내 최대 면적(2266㎢)의 국립공원(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이뤘다. 이영일 선생이 전망대 너머로 이 '흑산군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희가 내일 가는 홍도가 보입니다."
 전남 신안군 홍도 항구에는 해녀들이 운영하는 포장마차가 모여 있다. 지난 8월 17일 한 해녀가 뿔소라를 다듬고 있다.
ⓒ 소중한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에서 맛본 거북손은 생김새가 거북이의 앞발과 닮아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따개비류인 거북손은 껍데기를 벗겨 속살을 먹는다.
ⓒ 소중한
'검은 산' 이야기가 다음 날 '붉은 섬'으로 이어졌다. 흑산도 옆 홍도(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리)였다. 이 섬의 풍류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좋은 해산물을 맛본다는 데 있다. 시작은 선착장을 지나 포장마차가 잔뜩 몰려 있는 해안가였다. 30년 동안 물질하던 할매 해녀가 홍도 앞바다에서 한바구니 가득 잡은 소라·멍게·해삼을 술과 함께 내어줬다.
언덕을 오르면 보이는 횟집에서는 조금은 익숙치 않은 '부시리' 회가 싱싱하게 손질돼 나왔다. 소주 한 잔에 해조 무침과 회 몇 점을 같이 곁들이면 자박한 매운탕 냄새가 횟집에 섞여 퍼져 나갔다.
 지난 8월 17일 찾은 전남 신안군 홍도. 홍도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을 타면 어선에서 바로 잡은 생선을 곧장 회로 먹을 수 있다.
ⓒ 소중한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 전경.
ⓒ 소중한
홍도에서 탄 유람선은 회를 사고파는 해상 횟집으로 변신했다. 바다 한가운데 기암괴석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고 나면 횟감을 실은 배가 유람선에 접선했다. 쉴 새 없이 회를 썰어내던 뱃사람이 말했다.

"(회 접시들을 선상으로 올려보내며) 다들 자기 접시 찾으쇼."

두툼하게 썰려 나온 농어와 우럭을 술과 함께 들이켜며 해상 투어는 2시간 만에 끝났다. 홍도 앞바다의 이 기묘한 술집은 바다와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삶들을 끼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진행을 맡은 김근하 신안군 문화도시지원센터 사무국장은 흑산도와 홍도에서 보낸 1박 2일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세상의 70퍼센트가 바다로 덮여 있고 한반도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사람들은 육지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흑산도에 와 보면 바다 너머 더 다양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바다라는 경계와 육지라는 거대한 이름 속에 가려진 역사와 풍경을 찾아가는 섬 여행. 들고 나는 쾌속선을 타고 자발적 유배를 떠나는 흑산도 여행. 1박 2일이란 짧은 방문이 담아내지 못할 추억들이 지금도 그 작은 섬에선 계속되고 있었다.
 전남 신안군 홍도 항구에는 해녀들이 운영하는 포장마차가 모여 있다. 지난 8월 17일 포장마차에서 주문한 뿔소라, 전복, 해삼.
ⓒ 소중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 식당에선 '할매막걸리'를 판다. 인근 할머니 주민들이 직접 만든 막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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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관, 주한 파푸아뉴기니 대사관 관계자들이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를 유람선으로 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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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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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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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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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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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 사리공소(정약전길 26).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천주교 신앙 공간으로 흑산도 사리공소는 1958년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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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있는 새공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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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7일 전남 신안군 홍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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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6일 찾은 전남 신안군 흑산도. 주민이 바지락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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