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호적이 없는 나라
마침내 폭염이 죽었다. 너무 시달려 ‘물러갔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날씨에 성질을 내봐야 지구 온난화를 부채질한 사람 탓, 우리 탓인데, 끝장내자고 우격다짐하는 우리네 싸움판은 끝나지 않는다. 광복절-건국절 격투다. 광복절 경축식은 결국 두 조각 났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을 ‘친일 뉴라이트’로 간단히 낙인찍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외쳤다. 일제를 두둔하는 친일사관, 이승만을 받드는 건국사관이 나라를 망쳐먹는다고. 일견 그럴듯한데 저 일방적 논리 때문에 얼마나 정신 사나운 세월을 보냈는지 짜증이 다 난다. 정신을 후려치는 역사 폭염은 해방 79년째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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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염은 갔으나 ‘역사 폭염’은 여전
급진적 역사 입법 돌입한 민주당
절충주의도 친일 뉴라이트 낙인
호적 없이 21세기 항해하는 현실
」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당은 역사입법에 돌입했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찬양·고무하는 사람은 공직을 금지한단다. “헌법정신을 훼손하거나 민족정체성, 국가정체성에 반하는 사람들.” 대의(大義)는 번드레한데 내부는 엉망이다. 헌법정신의 역사적 산모(産母)는 무엇인가? 답이 엇갈린다. 민족·국가정체성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어렵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1919년 건국절’을 추진하다가 좌초됐다. 급진민족파 이념에 의하면, 상해임시정부 폄훼, 친일집단 관용, 일제 통치를 찬양하는 식민지근대화론, 나아가 ‘1948년 건국설’ 등이 척결 대상이다. 광복회 회장이 그날 들고나온 ‘9대 뉴라이트 판별법’과 판박이다. 그런데, 김형석 신임관장은 친일반민족적인가, 진정 뉴라이트인가?
김 관장을 두둔하고자 함이 아니다. 일방논리로 권력욕을 채우는 저열한 행위들이 역겨워하는 말이다.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도, 명사도, 학문이 깊은 학자도 아니다. 참신한 인물이지만 생뚱맞은 인사였다. 염두에 둔 인물이 아니었다는 광복회 회장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인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순진무구한 답변이 화를 불렀다. 이 회장이 보기에 제정신이 아닌 친일뉴라이트였다. 민주당이 얼씨구나 맞받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세 가지 쟁점이 핵심인데 모두 역사투쟁의 뇌관이다.
우선, ‘광복’의 의미 해석. 광복(光復)은 말 그대로 ‘빛을 되찾다’인데, 빛은 무엇인가? 영어로는 ‘restoration of independence’, 독립의 회복이다. 독립의 실체는? 좌파는 상해임시정부가 세운 ‘대한민국’, 우파는 그냥 ‘주권’이라 해석했다. 나라가 아직 없다고 본 것이다. 둘째, 나라가 없다면 언제 나라가 섰는가? 우파의 논리는 국가성립의 요건인 영토, 정부, 국민을 충족한 ‘1948년 건국’인 반면, 좌파는 독립투쟁의 장엄한 분투를 주도한 상해임시정부다. 그러니 당연히 ‘1919년 건국’이다. 1948년 대한민국의 출범은 좌파에게 ‘정부 수립’에 불과하고 게다가 그 정부는 분단국가라는 반민족적 원죄를 지은 반쪽짜리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친일집단에 면죄부를 주고(반민특위를 해체했다) 분단을 획책한 반민족적 정치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좌파는 꼼짝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헷갈린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를 묻는다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김형석 신임관장은 중도우파 쪽으로 절충했다(그의 저서 『끝나야 할 역사전쟁』). 첫째, 해방과 광복은 다르다. 광복절은 어의(語義)상 독립의 완성을 뜻하는 건국절이다. 제헌의회에서 1948년 8·15를 ‘독립기념일’로 제정한 바 있다. 둘째, 상해임정은 국가가 아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주도한 오랜 열혈 투쟁은 ‘1948년 건국’에서 결실을 보았다. 셋째, 이승만이 유일한 국부(國父)라는 단순 논리를 지양하고 김구, 김규식, 조소앙, 송진우 등 많은 애국지사들을 ‘건국의 아버지들’로 불러야 한다. 넷째, 친일을 마구잡이로 매도하거나 소극적 친일조차 반민족행위로 처벌하는 것은 국민통합을 해친다.
그의 중도우파적 절충이 허술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친일 뉴라이트’라는 광복회장의 비난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는 곡물 수탈을 수출이라 하지 않았고, 일제 통치를 찬양하지 않았으며, 징용과 위안부를 자발적이라 강변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은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독립기념관 이사로 임명되기는 했다. 아무튼 그날 효창공원의 절규는 낙인찍기 포효였다. 이 회장도 민주당도 조금 멋쩍지 않을까?
4년 전 김원웅 관장의 도발적 제안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 행위자 파묘(破墓) 운동이 벌어졌다. 검은 리본이 덧씌워진 묘석의 주인공 김득모 중령은 흥남부두 철수 작전의 영웅이었다. 세계 상공엔 드론 폭격기들이 난무하는데, 독도 지우기나 계엄령 궤변 같은 지리멸렬한 논란들로 허송세월하는 게 한국의 역사 폭염이다. 윤 정부가 빌미를 제공하기는 했다. 묻지마 인사(人事)나 ‘반체제’ 함의가 가득한 반국가세력 운운 발언이 폭열(暴熱)을 더했다.
폭염처럼 다 물러가기를 진정 원한다. 한국은 호적 없이 21세기를 항해하는 유일한 경제대국이다. 세 불리기에 혈안이 된 좌우파 역사투쟁이 건국 원적을 등록도 못하게 두 개로 만들었다. 수능에 출제된다면 나라가 뒤집힐 것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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