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근의 시선] 관치에도 격이 있다
관치 논란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반박은 아마도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일 테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2003년 카드 사태 당시 했던 말이다. 옛 재무부 출신 금융관료 집단, 이른바 ‘모피아’는 관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개발연대를 지나면서 이런 모피아 사이에서도 일종의 개입 원칙이 자리 잡았다. 요약하자면 절제와 일관성이다. 시장 개입은 꼭 필요할 때 최소한으로 하고, 달성하려는 정책 목표와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가격에 손대는 건 최후의 방편이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있었다. 시장 왜곡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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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부채 불길에 은행 압박
거칠고, 모호하고, 무책임해
정책미스 덮는 ‘퇴화한 관치’
」
그런데 최근 은행을 상대로 한 대출죄기 소동을 보면 당국은 이 원칙과는 철저히 거꾸로 갔다. 개입의 타이밍은 늦었고, 방식은 거칠었으며, 일관성도 없다. 가계 대출을 줄이라는 당국의 지침에 시중은행들은 7월 중순 이후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연속적으로 끌어올렸다. 이런 상황이 근 한 달간 이어지자 대출자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시장 금리가 내려가는 상황에서 대출금리만 올라가는 ‘역주행’이 벌어지면서다. 그러자 인상을 묵인하는 듯했던 당국은 “언제 우리가 금리 올리라 했나”며 은행에 다시 눈을 부라렸다. 서슬에 놀란 은행들은 아예 대출 창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은행만 탓하며 발뺌하기엔 정책 실패의 흔적이 너무 뚜렷하다. 가장 눈에 띄는 패착은 6월 말에 나온 대출규제 연기 조치다.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2단계 적용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갑작스레 두 달 연기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자영업자들 사정이 어렵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상황을 봐야 한다”는 다소 막연한 설명이 뒤따랐다. DSR의 강화는 이 정부의 핵심 가계부채 대책이었다. 이를 슬그머니 미루니 시장에선 ‘정부가 딴 생각하는 거 아니냐’는 의심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금리 인하 기대와 각종 정책대출 확대에 서울 아파트값이 뜀박질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 결과 5대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증가 폭은 6월 5조8466억원에서 7월 7조5975억원으로, 8월 8조9115억원으로 커졌다. 결국 DSR 규제는 당초 계획보다 더 강화된 내용으로 1일부터 시행됐다. 이 대목에서 밀턴 프리드먼이 말한 ‘샤워실의 바보’를 떠올린 건 기자뿐일까. 냉수와 온수를 왔다 갔다 하듯 널뛰는 정책에 애먼 실수요자들만 낭패를 겪게 된 셈이다.
더 뼈아픈 건 한국은행에 파급된 ‘나비효과’다. 8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바로 전달 이창용 총재가 “차선 바꿀 준비를 하겠다”며 인하 시그널을 보냈지만, 막상 금통위에선 금리를 내리자는 소수의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집값 불안에 금통위원들이 움츠러들면서다. 이런 분위기라면 10월 인하도 장담할 순 없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효과가 체감되려면 통상 6개월은 걸린다. 고금리의 고통이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자칫 내년 상반기 본격적인 경기 침체라도 온다면 실기의 후유증을 우리 경제 전체가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왜 이런 정책 혼선이 빚어졌을까. 지난달 27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에 이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 있다.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질문에 윤 대통령은 “가계부채가 지난 정부에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90%대 후반이었고, 우리 정부에서는 90%대 초반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계부채 규모 자체는 커졌지만 경제 규모와 비교하면 전 정부 대비 상황이 나아졌다는 의미다. 이것이 정부가 공유하는 시각이라면 당장 정책담당자에게 가계부채 문제보다는 움츠러든 내수나 PF 부실 문제가 커 보였을 수 있다. 나아가 DSR 강화는 좀 늦춰도 될 것이고, 서울 아파트값 상승도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면 PF 연착륙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을 수 있다.
가계부채 비율이 전 정부 때보다 줄어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적인 속도다. 고금리 속에서도 우리 가계의 디레버리징(부채 감축) 속도는 다른 주요국들에 못 미친다. 여전히 전 세계 최상위권이고, ‘임계점’으로 불리는 80% 선을 훌쩍 넘어서 있다. 아직 갈 길이 한참이란 얘기다.
돌이켜보면 주요 정책 실패의 근원에는 늘 방심과 자만이 있었다. 그에 따라 치러야 할 대가도 점점 커진다. 최근 논란에 외국인들은 국내 은행주를 앞다퉈 던지고 있다. 정부 역점사업인 밸류업 프로그램의 진정성까지 의심받는 형국이다. 이런 시장의 역습에 관치의 유용성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거칠기 그지없는 ‘퇴화한 관치’야 말해 무엇하겠나.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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