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주변 흡연 엄벌한다는데 교복 입고도 사는 전자담배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인터넷·배달 판매까지 규제 비웃는 액상담배〉
지난달 24일 오후 10시쯤 서울 강남의 한 전자담배 무인판매점을 찾아갔다. 한 달 전쯤 한 시민단체에서 미성년자도 손쉽게 전자담배를 살 수 있다며 영상을 촬영한 장소다. 직원이 없고 자동판매기만 있어 일사천리로 액상 전자담배를 사는 장면이 영상에 담겼다.
직접 가보니 영상에서 본 ‘전자담배’ 간판이 눈에 띈다. 꾸준히 손님이 찾아와 액상 담배를 사 갔다. 간혹 중년도 보였지만, 대개 젊은 사람들이었다. 미성년자로 의심되는 경우도 있지만, 시민단체 영상처럼 아무도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시민공론광장 청소년유해시민감시단이 촬영한 전자담배 구매 장면은 놀랍다. 서울 시내 세 곳의 무인 전자담배 매장에서 교복 차림의 남녀가 액상 담배를 구매하는 모습을 찍었다. 교복을 입고 들어가 자동판매기 앞에서 액상 담배를 사는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나이 확인 절차는 종이에 복사해간 신분증을 대니 무사통과다. 감시단 이경훈 대표(수원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액상 담배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해 회원들이 자녀와 함께 방문해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매장엔 '담배 배달' 앱 홍보
직접 찾아가 본 매장엔 폐쇄회로(CC) TV가 곳곳에 설치돼있고, ‘24시간 콜센터’ 전화번호도 적혀있으나 청소년 보호엔 무용지물이었다. 법적으로 담배 판매는 엄격히 규제된다. 담배사업법 17조는 청소년에게 담배를 판매한 경우에 대한 제재 조항을 담고 있다. 니코틴이 없는 제품이 아닐까 싶어 자판기에서 상품을 살펴봤다. 무작위로 하나를 눌렀더니 ‘니코틴 함량 9.8㎎’이라고 뜬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이유로 관련 당국은 현행법상 ‘담배의 정의’의 한계를 꼽는다. 담배사업법 2조는 담배를 ‘연초(煙草)의 잎을 원료의 전부 또는 일부로 하여 피우거나, 빨거나, 증기로 흡입하거나, 씹거나, 냄새 맡기에 적합한 상태로 제조한 것’으로 한정했다. 연초의 잎이 안 들어가면 담배 규제를 벗어난다. 전자담배 무인판매점도 이런 허점을 노렸다. 액상 담배 업자들은 판매 제품이 연초의 잎으로 만든 게 아니라 화학적으로 제조한 ‘합성 니코틴’ 제품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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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유해감시단, 교복 차림으로 액상담배 일사천리 구매
무인판매 점포엔 담배에 금지된 경품행사에 과일향 유혹
‘연초 잎’ 담배 정의에 ‘줄기·뿌리·합성’이라며 규제 피해
17일 시행한 학교 앞 금연 정책도 액상 담배 발뺌엔 무력
」
담배의 정의를 악용하는 건 오래된 수법이다. 2022년 수원지법은 액상 담배 업자에게 세무 당국이 부과한 담배 소비세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업체 측은 액상 담배가 연초의 ‘잎’이 아니라 ‘줄기’에서 추출했기 때문에 담배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합성 니코틴이라고 주장한 제품 역시 연초의 잎을 원료로 했다고 판단했다.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는 2019년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줄기, 뿌리 니코틴 등’으로 담배 정의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도 제자리다. 이후 액상 담배 판매가 급증하면서 청소년 흡연의 촉매제 노릇을 하고 있다.
담배 정의를 피해간 전자담배 무인 판매소는 국민 건강을 고려한 담배사업법의 각종 제한을 무색게 한다. 12조는 ‘우편판매 및 전자거래’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매장을 보니 액상 담배를 배달 주문하는 앱의 QR코드까지 게시하고 있다. 각종 인터넷 쇼핑몰에서 액상 담배를 검색하면 수도 없이 쏟아진다.
학교 앞 흡연 처벌도 난감
법 25조는 담배의 위험을 경시하는 문구 사용을 금지한다. 판매 촉진 행위도 못 하게 했다. 하지만 전자담배 무인매장엔 ‘액상 1+1 꽝 없는 당첨’ 판촉 광고물이 설치돼 있다. 제품 화면은 애플, 알로에, 피치, 레몬 등 과일 이름과 연두, 분홍 등 신선한 색감으로 채워져 있다. 각종 담배 규제를 희화화하는 양상이다.
이런 허점은 정부의 금연 정책에도 찬물을 끼얹는다. 복지부는 지난달 17일 한층 엄격해진 흡연 규제를 발표했다. 어린이집과 학교 주변 30m 이내에 전면 금연을 실시하고 위반자를 제재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담배사업법 규정을 회피한 액상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될까.
한국건강증진개발원 관계자는 “일단 단속은 하는데 이후에 법에서 제외되는 전자담배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액상 담배 흡연자를 단속해도 연초 잎에서 추출한 액상 담배가 아니면 과태료를 못 물린다는 얘기다.
이처럼 희한한 현상이 빚어지는 건 소관 부처가 복잡한 탓도 있다. 담배의 생산 및 유통은 기재부 업무인데 건강 관련 규제는 복지부가 담당하고 수입은 관세청 관할이다. 사공이 많은데 아무도 노를 안 젓는 셈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인터넷 판매 단속 등에 대해 “담배의 정의를 담은 담배사업법은 기재부 소관 법률”이라며 “액상 담배가 줄기든, 뿌리든 전부 담배라고 정의되는 순간 저희의 규제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주변 흡연 단속에 대한 질문엔 “일단 단속은 하고 성분에 대한 다툼은 이의 제기를 통해서 해야 한다”고 확인했다.
더 심각한 사안은 연초 잎에서 추출한 천연 니코틴 액상 담배를 화학적으로 만든 합성 니코틴이라고 속여 파는 행위다. 현행법상 담배인 제품을 담배가 아니라고 속여 규제를 빠져나간다.
기재부 관계자는 “연초의 잎과 줄기, 뿌리에서 나온 천연 니코틴은 담배로 세금을 물리고 있으나 합성 니코틴은 제외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합성 니코틴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천연 니코틴을 합성으로 속여 팔면서 탈세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몇 군데를 경찰이 수사하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기재부·복지부·식약처 사각지대
기재부 측은 “담배의 정의를 확장하려면 합성 니코틴의 유해성이 입증돼야 한다”며 “이를 위한 연구를 진행해 결과를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담배의 유해성 관련 주무부처는 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라고 했다.
그러나 식약처는 담배인 천연 니코틴 액상을 합성 니코틴이라고 속이는 부분을 검사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최근 입법으로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선 식약처가 일부 관리를 맡게 됐다”며 “그러나 합성 니코틴은 법상 담배가 아니니 식약처가 관리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담배를 속여서 파는 행위는 소관 부처인 기재부가 단속해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시중에서 마구잡이로 파는 합성 니코틴 액상 담배를 분석하면 연초 잎이 원료인 천연 니코틴 성분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담배라는 얘기다. 의약품 등을 분석하는 에스엘에스바이오 김봉휘 연구소장은 “담뱃잎에는니코틴뿐 아니라 ‘아나바신’ 같은 물질이 있는데 니코틴을 분석해서 아나바신이 나오면 담뱃잎이라는 얘기”라고 설명한다. 김 소장은 “시중에서 파는 합성 니코틴을 분석해보면 아나바신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업계서도 "당장 규제해야"
합성 니코틴 업계의 한국전자액상안전협회 박필규 사무총장은 “합성 니코틴으로 속인 연초 잎 니코틴은 성분검사만 한다면 담배사업법, 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 등록·평가법, 청소년보호법, 관세법 등 현행법으로도 규제가 가능하다”며 "이런 업체들이 지난 8년간 탈루한 세금이 엄청나다”고 주장했다.
액상 담배 판매 규제가 시급한 이유 중엔 액상 니코틴의 위험성도 있다.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선 끔찍한 사건에 대한 선고가 나왔다. 갈등을 빚던 배우자에게 니코틴 원액을 먹여 살해한 혐의에 대한 재판이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불충분하다고 봤으나 사인은 니코틴 원액 과다복용으로 판단했다. 일반 담배에는 없었던 위험이다. 당장 심각한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터지는데 법 개정만 기다리는 모양새다. 검사 출신인 황종근 변호사는 “국민 건강과 연관된 문제인 데다 탈세와도 관련된 부분이니 정부에서 전수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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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는 신종 담배 규제 방침 정해”
국민의힘 한지아 의원(사진)은 2일 “온라인이나 무인점포를 통해 청소년이 액상 전자담배를 손쉽게 살 수 있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청소년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점이다. 질병관리청 조사에서 ‘딸기향’ ‘포도향’을 첨가한 담배로 흡연을 시작한 경우가 70%에 달했다. 무인점포는 청소년이 신분증을 도용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되고 있다.”
-왜 이 지경까지 왔나.
“액상 담배는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청소년에게 판매가 금지돼있으나 전자담배 자체에 판매 규제가 없다 보니 법적 근거가 부재하다. 니코틴으로 만든 담배의 규제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어떤 해결책이 필요한가.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은행은 신종 담배와 관련한 기본 방침을 정했다. 우리도 국민에게 유해성을 소상히 알려야 한다. 철저한 수사와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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